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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8.03 반성 16.
  2. 2011.07.21 사과나무.
  3. 2011.07.15 기억의 우주.

반성 16.

BookToniC 2011. 8. 3. 06:13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 김영승, 반성,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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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나무.

BookToniC 2011. 7. 21. 07:09

사과나무를 사야겠다고 나서는 길에 화들짝 놀란다 어디에 심을지 아니면 어디에 기대 놓을지를 생각하다 혹 마음에 묻으려고 하는 건 아니냐고 묻는다 이 엄동설한에 사과나무는 뭐하게요 없다고 말하는 화원의 사내는 사과나무 허리 같은 난로를 껴안고 있다

나에게 혹 웅덩이를 파고 싶은 건 아니냐고 되묻는다 그 웅덩이에다 세상 모든 알들을 데려다 버리고 욕 묻은 손들을 데려다 숨기면서 조금 나아지려는 게 아니냐며 나는 난로 대신 두툼한 머리 언저리를 감싼다

사과나무를 사려했던 것은 세상 모든 물체가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만유인력을 보고자 했던 것이므로 누군가 만유인력을 알아차렸다는 그 자리로 간다 사력을 다해 간다

숲과 대문, 그 사이에 사과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누구나 저 사과나무한테 빚진 게 있다 어디 먼 데서 오는 길이냐고 물어오지도 않고 낙과들을 지키고 서 있는 나무는 장엄하였다 그 나무 아래 누군가가 내려놓은 수많은 가방들이 있었다 누구나 들여놓아야 할 가방이 있다

문득 누군가 만유인력을 알아차렸다는 그 나무 밑에
함부로 혼자 있고 싶은 것은 다 그런 이유 때문

- 이병률, 찬란,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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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우주.

BookToniC 2011. 7. 15. 12:16

고개를 든 것뿐인데
보면 안 되는 거울을 본 것일까

고통스레 관계를 맺은 기억들,
기억의 매혹들이
마지막인 것처럼 몰려오고 있다
이제 쓰거운 것이 돼버린 파문들을
단숨에 먹어치우고 끝내버리자는 것일까

하나의 지구를 녹이고
또 하나의 지구를 바꾸게 되었다
기억하고 있다면 기억하지 말라는 듯
우주는 새들을 풀어놓았다
무엇으로 다시 천지를 물들일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한 듯

소멸하지 않는 기억의 우주를
쌓이고 쌓이는 외부의 내부를
어쩌자고 여기까지 몰고 와서는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해를 보면 어두워지는
달을 보면 환해지는 기억들은
왜 적막하게 떠돌지 못하고
우주에 스미는 것일까

- 이병률, 찬란,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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