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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2.10 한숨처럼 낮게 한번, 잠시 뒤 소리내어 한번 더.
  2. 2014.05.15 미래가 쏟아진다면.
  3. 2014.04.24 이 편지를 쓰는 것은.


 그날밤 난 홑이불을 배에 감고 누워 일찍 잠든 척하고 있었지. 언제나처럼 야근을 하고 들어온 누나가, 언제나처럼 세면장에 상을 펴고 식은 밥을 찬물에 말아 먹는 소리가 들렸어. 씻고 이를 닦은 누나가 발뒤꿈치를 들고 들어와 창문으로 다가가는 옆모습을, 난 어둠속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봤어. 모기향이 잘 타고 있는지 확인하려던 누나는, 내가 창틀에 세워놓은 칠판지우개를 발견하고 웃었어. 한숨처럼 낮게 한번, 잠시 뒤 소리 내어 한번 더.


 누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헝겊 지우개를 한번 들었다가 제자리에 놓았지. 언제나처럼 나에게서 멀리 이불을 펴고 누웠다가, 가만가만 무릎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지. 잠든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나는 정말로 눈을 꼭 감았지. 누나가 내 이마를 한번, 뺨을 한번 쓰다듬곤 이부자리로 돌아갔어. 좀 전에 들렸던 웃음소리가 어둠속에서 다시 들렸어. 한숨처럼 낮게 한번, 잠시 뒤 소리내어 한번 더.


 캄캄한 이 덤불숲에서 내가 붙들어야 할 기억이 바로 그거였어. 내가 아직 몸을 가지고 있었던 그 밤의 모든 것. 늦은 밤 창문으로 불어들어오던 습기 찬 바람, 그게 벗은 발등에 부드럽게 닿던 감촉. 잠든 누나로부터 희미하게 날아노는 로션과 파스 냄새. 삐르르 삐르르, 숨죽여 울던 마당의 풀벌레들. 우리 방 앞으로 끝없이 솟아오르는 커다란 접시꽃들. 네 부엌머리 방 맞은편 블록담을 타고 오르는 흐드러진 들장미들의 기척. 누나가 두번 쓰다듬어준 내 얼굴. 누나가 사랑한 내 눈 감은 얼굴.


-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AND


나는 먼 곳이 되고 싶다


철로 위에 귀를 댄 채

먼 곳의 소리를 듣던 아이의 마음으로


더 먼 곳이 되기 위해선 무얼 해야 할까

꿈속이라면 아이가 될 수도 있다

악몽을 꾸게 될 수도 있다


몸이 자꾸 나침반 바늘처럼 떨리는 아이가 되어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봐 괴로워하면서

몸이 자꾸 깃발처럼 펄럭이는 아이가 되어

어리석은 사랑에 빠졌을까 봐 괴로워하면서


무녀리로 태어나 열흘을 살다 간

강아지의 마음으로

그 뭉근한 체온을 안고 무덤을 만들러 가는

아이였던 마음으로

꿈에서 깨게 될 것이다


울지 마, 울지 마

라며 찰싹찰싹 때리던 엄마가 실은

자기가 울고 싶어 그랬다는 걸

알아버린 아이가 될 것이다


그럴 때 아이들은 여기에 와서

모르는 사람에게 손을 흔든다


꿈이라면 잠깐의 배웅이겠지만

불행히도 꿈은 아니라서 마중을 나온 채


그 자리에서 어른이 되어간다

마침내 무엇을 기다리는지 잊은 채로


지나가는 기차에 손을 흔들어주는

새까만 아이였던 마음으로

지금 나는 지나가는 기차가 되고 싶다


목적 없이고 손 흔들어주던 아이들은

어디에고 있다는 걸 알고 싶다


- 김소연, <수학자의 아침>, 문학과 지성사

AND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유리병 속에 편지를 넣는 것과 같아요.

그리고 바라죠.

편지가 일본에 가 닿기를.


- 앨리스 먼로, <디어 라이프>,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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