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ARTICLE 나희덕 | 4 ARTICLE FOUND

  1. 2013.07.02 몰약처럼 비는 내리고.
  2. 2011.08.07 그의 사진.
  3. 2011.06.01 두고 온 집.


뿌리뽑힌 줄도 모르고 나는

몇줌 흙을 아직 움켜쥐고 있었구나

자꾸만 목이 말라와

화사한 꽃까지 한무더기 피웠구나

그것이 스스로를 위한 弔花인 줄도 모르고


오늘밤 무슨 몰약처럼 밤비가 내려

시들어가는 몸을 씻어내리니

달게 와닿는 빗방울마다

너무 많은 소리들이 숨쉬고 있다


내 눈에서 흘러내린 붉은 진물이

낮은 흙 속에 스며들었으니

한 삼일은 눈을 뜨고 있을 수 있겠다


저기 웅크린 채 비를 맞는 까치는

무거워지는 날개만큼 말이 없는데

그가 다시 가벼워진 깃을 털고 날아갈 무렵이면

나도 꾸벅거리며 밤길을 걸어갈 수 있겠다


고맙다, 비야. .....고맙다. .....고맙다. .....


- 나희덕, <어두워진다는 것>, 창작과비평사

AND

그의 사진.

BookToniC 2011. 8. 7. 10:39

그가 쏟아놓고 간 물이
마르기 위해서는 얼마간 시간이 필요하다
사진 속의 눈동자는
변함없이 웃고 있지만 실은
남아 있는 물기를 거두어들이는 중이다
물기를 빨아들이는 그림자처럼
그의 사진은 그보다 집을 잘 지킨다
사진의 배웅을 받으며 나갔다
사진을 보며 거실에 들어서는 날들,
그 고요 속에서
겨울 열매처럼 뒤늦게 익어가는 것도 있으니
평화는 그의 사진과 함께 늙어간다
모든 파열음을 흡수한 사각의 진공 속에서
그는 아직 살고 있는가
마른 잠자리처럼 액자 속에 채집된 어느 여름날의 바닷가, 그러나
파도소리 같은 건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사진 속의 눈동자는
물기를 머금은 듯 웃고 있지만
액자 위에는 어느새 먼지가 쌓이기 시작한다
볕이 환하게 드는 아침에는 미움도
연민도 아닌 손으로 사진을 닦기도 한다
먼지가 덮으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걸레가 닦으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 나희덕, 야생사과, 창비
AND

두고 온 집.

BookToniC 2011. 6. 1. 04:01

오래 너에게 가지 못했어.
네가 춥겠다, 생각하니 나도 추워.
문풍지를 뜯지 말 걸 그랬어.
나의 여름은 너의 겨울을 헤아리지 못해
속수무책 너는 바람을 맞고 있겠지.
자아, 받아!
싸늘하게 식었을 아궁이에
땔감을 던져넣을 테니.
지금이라도 불을 지필 테니.
아궁이에서 잠자던 나방이 놀라 날아오르고
눅눅한 땔감에선 연기가 피어올라.
그런데 왜 자꾸 불이 꺼지지?
아궁이 속처럼 네가 어둡겠다, 생각하니
나도 어두워져.
전깃불이라도 켜놓고 올 걸 그랬어.
그래도 이것만은 기억해.
불을 지펴도 녹지 않는 얼음조각처럼
나는 오늘 너를 품고 있어.
봄꿩이 밝은 곳으로 날아갈 때까지.

- 나희덕, 야생사과, 창비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