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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5.21 그는 세계를 설계했다.
  2. 2011.05.20 이룰 수만 있다면.
  3. 2011.05.18 물방울들.


말에 대한 시인의 과민한 감각에 더러 마음이 서늘해지는 것도 [Love Adagio]를 읽는 재미 가운데 하나다. 명사를 의태어로, 부사적으로 사용하면서 이를 다시 비틀어 걸음의 통통 튀는 느낌을 자아내는 "발. 발, 발, 밤, 밤, 밤"(빨리 걷다) 같은 표현이나, 보이지 않는 것을 또렷이 보게 만드는 "칠월이 가고 팔월이 온다. 여름이 두 다리를 벌리고 굴뚝 위에 올라앉는다."(침묵의 뿌리) 같은 표현 앞에서 내 마음은 서늘하다. 이런 대목들은 [Love Adagio]에 출렁이는 시인의 능변이 겉보기와 달리 세심히 조율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낳는다. 그렇다면 박상순은 조각가가 끌로 돌을 쪼듯 언어로 제 뇌를 쪼아 이 낯선 세계를 조각해낸 것이다. 그는 세계를 재현하지 않고 세계를 설계했다. 창세기의 신神처럼. 과연 새로운 세계다. 아스라한 환幻의 세계, 아슬아슬한 헛것의 세계.

- 고종석, 모국어의 속살,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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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룰 수만 있다면.

BookToniC 2011. 5. 20. 05:43

사랑하는 친우親友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의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했네.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더욱 좋겠네.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돈을 의미)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 전태일의 유서 전문, 조경래 저 전태일 평전, 돌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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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들.

BookToniC 2011. 5. 18. 21:09

그가 사라지자
사방에서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물때 낀 낡은 씽크대 위로
똑,똑,똑,똑,똑.....
쉴새없이 떨어져내리는 물방울들

삶의 누수를 알리는 신호음에
마른 나무뿌리를 대듯 귀를 기울인다

문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발소리 같기도 하고
때로 새가 지저귀는 소리 같기도 한

물소리

물방울 속에서 한 아이가 울고
물방울 속에서 수국이 피고
물방울 속에서 빨간 금붕어가 죽고
물방울 속에서 그릇이 깨지고
물방울 속에서 싸락눈이 내리고
물방울 속에서 사과가 익고
물방울 속에서 노랫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물관을 타고 올라와
빈방의 침묵을 적시는 물방울들은
글썽이는 눈망울로 요람을 흔들어준다
내 심장도 물방울을 닮아간다

똑,똑,똑,똑,똑,똑.....
빈혈의 시간으로 흘러드는 낯선 핏방울들

- 나희덕, 야생사과,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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