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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5.16 물속에서.
  2. 2011.05.12 혼동.
  3. 2011.05.10 잉여론.

물속에서.

BookToniC 2011. 5. 16. 04:06

가만히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내가 모르는 일이 흘러와서 내가 아는 일들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떨고 있는 일
나는 잠시 떨고 있을 뿐
물살의 흐름은 바뀌지 않는 일
물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푸르던 것이 흘러와서 다시 푸르른 것으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투명해져 나를 비출 뿐
물의 색은 바뀌지 않는 일

(그런 일이 너무 춥고 지루할 때
내 몸에 구멍이 났다고 상상해볼까?)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조금씩 젖어드는 일
내 안의 딱딱한 활자들이 젖어가며 조금씩 부드러워지게
점점 부풀어오르게
잠이 잠처럼 풀리고
집이 집만큼 커지고 바다가 바다처럼 깊어지는 일
내가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내 안의 붉은 물감 풀어놓고 흘러가는 일
그 물빛에 나도 잠시 따스해지는

그런 상상 속에서 물속에 있는 걸 잠시 잊어버리는 일

-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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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동.

BookToniC 2011. 5. 12. 22:22

가을밤에 뒷마당에 서 있는데
풀벌레가 울었다
바람이 일고
시누대 댓잎들이 바람에 쓸렸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풀벌레 소리
댓잎 소리
또 한번은
겹쳐
서로 겹쳐서
그러나 댓잎 소리가 풀벌레 소리를 쓸어내거나
그러나 풀벌레 소리가 댓잎 소리 위에 앉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혼동이라는
그 말에
큰 오해가 있음을 알았다
혼동이라는
그 말로
나를 너무 내세웠다

- 문태준, 그늘의 발달,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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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론.

BookToniC 2011. 5. 10. 22:38

사실 무엇인가를 후회한다는 것은, 혹은 무엇인가를 아쉬워한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사실 지금-여기 현실에 대해서 결핍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보다 더 나은 현실을 욕망하는 것이다. 지금-여기보다 더 나은 현실을 욕망하기 때문에 지금-여기의 현실의 무언가가 결핍된 듯이 느껴지는 것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무엇인가를 후회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아쉬워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힘이 잉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어서, 후회와 아쉬움은, 욕망과 희망의 첫 느낌일 뿐 절망할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이런 망상까지 해보았다.

이 막막한 우주에서, 이 엄청난 인구수 중에서, 나라는 미약한 존재는 없어도 되는 개체이지만 그러나 없어도 되는 허무한 존재가 아니라, 없어도 되는데 생겨난 '잉여'에서 오는 자유로운 존재임을, 어떤 책임이 부여되기보다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자유로운 존재임을, 마치 자식 많은 집의 없어도 되는 막내자식처럼 어쩌면 자기 마음껏 자기를 찾아가는 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의무가 아닐까.

국가나 기업이나 제도, 관습이나 이념이, 그리고 무엇보다 천민자본의 논리가 우리를 뭔가 '결핍'된 존재로 여기고 우리를 관리하고 규율하려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이 우주의 남아도는 '잉여'로서 존재하기에 자기 멋대로 살아도 되는, 자기 멋대로 살아야만 즐거운, 이 우주의, 저 안드로메다의, 막내공주와 막내왕자들이 아닐까.

- 이만교, 글쓰기 공작소,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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