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ARTICLE 분류 전체보기 | 323 ARTICLE FOUND

  1. 2011.06.20 잊혀지는.
  2. 2011.06.20 정의로운 예루살렘을 위한 판결문.
  3. 2011.06.18 그의 말을 들을수록.

잊혀지는.

Pooongkyung 2011. 6. 20. 05:34

다시 익숙한 거리 어디쯤에서 길을 잃었다. 나의 꿈의 세계는 대개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자랐던 익숙한 전농 4동 골목길에서부터 시립대 정류장 앞까지의 길은 분명하고 뚜렷하게, 그리고 그곳을 벗어나서는 근거리의 기억과 원거리의 추억이 버무려져 알 수 없는 길들을 멋대로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그 동네에서는 버스와 지하철이 정말 중요한 교통수단인데, 그것을 타고 움직이다 보면 대개 익숙한 길에서 시작해 낯선 거리에서 끝나곤 한다.

낯선 그 어느 거리에서 또다시 나는 버려졌다. 익숙한 거리로 돌아오는 길은 더할나위 없이 쓸쓸하고, 하필이면 같은 사람에게 거듭해서 버려졌다는 게 믿을 수 없어 기가 막혔다. 뭐라고라도 한마디 하고 싶어서, 내가 버려진 그곳을 그 사람이 남은 그곳을 다시 찾아가려고 재차 눈을 감았다. 쪽잠에 들때마다 나는 재수 좋게도 익숙한 거리로 그 버스 정류장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정류장 앞에서 튀김을 파는 500냥 분식 할머니는 아까도 꽤 아까도 지금도 분주히 손을 놀리지만, 나는 어느 버스를 타야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을지를 몰라 매번 허둥댔다. 내가 가려는 곳이 그곳인지조차 의심스러워 어느 버스는 흘려 보냈다. 그와중에 난생 처음 보는 3517번 버스를 타면 어디를 가려나 하고 궁금해 하기도 하고.

아무튼, 그 익숙한 거리 어디쯤에서 나는 또 길을 잃었다.
AND


피고(아이히만)는 전쟁기간 동안 유대인에게 저지른 범죄가 기록된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범죄라는 것을 인정했고, 또 피고가 거기서 한 역할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피고는 자신이 결코 사악한 동기에서 행동한 것이 결코 아니고, 누구를 죽일 어떠한 의도도 결코 갖지 않았으며, 결코 유대인을 증오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와는 다르게 행동할 수는 없었으며, 또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믿기가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동기와 양심의 문제에서 합당한 의심을 넘어선 것으로 입증될 수 있는 당신에 대한 증거는 비록 많지는 않지만 일부 존재합니다.

피고는 또한 최종 해결책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은 우연적인 것이었으며, 대체로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역할을 떠맡을 수 있으며, 따라서 잠재적으로 거의 모든 독일인들이 똑같이 유죄라고 말했습니다. 피고가 말하려는 의도는 모든 사람, 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유죄인 곳에서는 아무도 유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상당히 일반적인 결론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피고에 대해 기꺼이 내주고 싶은 결론은 아닙니다. 그리고 만일 피고가 우리의 거절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서에 나오는 두 이웃하는 도시인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에 주목해 볼 것을 권합니다. 이 두 도시는 거기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죄가 있었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내려온 불로 인해 파괴되었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집단적 죄'라는 최신식 개념과는 무관합니다. 이 개념에 따르면 그들 자신이 행하지 않았더라도 그들의 이름으로 행해진 일(그들이 참여하지도 않았고 또 그로부터 이익을 얻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유죄로 추정한다는 것, 또는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법 앞에서의 유죄와 무죄는 객관적인 본질의 것이지만, 그러나 비록 8천만 독일인이 피고처럼 행동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피고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운 좋게도 우리는 그만큼 멀리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피고 자신은 전대미문의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주된 정치적 목적이 된 국가에서 산 모든 사람의 편에 서서 그 죄가 현실적으로가 아니라 오직 잠재적으로만 유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내적이고 외적인 어떠한 우연적 상황을 통해 피고가 범죄인이 되는 길로 내몰렸는지 간에, 피고가 행한 일의 현실성과 다른 사람들이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잠재성 사이에는 협곡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오직 피고가 한 일에만 관여할 뿐, 피고의 내적 삶과 피고의 동기에서 가능한 비범죄적 본성 또는 피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범죄적 가능성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피고는 피고의 이야기를 불운에 찬 이야기로 만들어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알고 있는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는 만일 상황이 보다 유리했더라면 피고는 우리 앞이나 또는 다른 형사재판소로 나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는 점도 당신에게 인정해 줄 용의가 있습니다.

논증을 위해서 피고가 대량학살의 조직체에서 기꺼이 움직인 하나의 도구가 되었던 것은 단지 불운이었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그래도) 피고가 대량학살 정책을 수행했고, 따라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피고와 피고의 상관들이 누가 이 세상에 거주할 수 있고 없는지를 결정한 어떤 권한을 갖고 있는 것처럼) 이 지구를 유대인 및 수많은 다른 민족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하지 않는 정책을 피고가 지지하고 수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즉 인류 구성원 가운데 어느 누구도 피고와 이 지구를 공유하기를 바란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교수형에 처해져야 하는 이유, 유일한 이유입니다.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AND


아르헨티나나 예루살렘에서 회고록을 쓸 때나 검찰에게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그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똑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떤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아렌트가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재판을 참관하고 뉴요커에 보고서 형태로 연재했던 글을 모은 책이다. 책을 읽으며 기대하지 않았던 놀라움을 주는 것은 그녀의 문장이다. 번역서라는 근본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진실한 사유와 반짝이는 재치가 '품격있게' 문장에 녹아들어 있다. 그 솜씨가 대단히 능숙하고 유려하여, 풍부한 통찰을 담은 내용과 더불어 글을 읽는 맛을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끌어올려 놓는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