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나 예루살렘에서 회고록을 쓸 때나 검찰에게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그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 똑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떤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아렌트가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재판을 참관하고 뉴요커에 보고서 형태로 연재했던 글을 모은 책이다. 책을 읽으며 기대하지 않았던 놀라움을 주는 것은 그녀의 문장이다. 번역서라는 근본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진실한 사유와 반짝이는 재치가 '품격있게' 문장에 녹아들어 있다. 그 솜씨가 대단히 능숙하고 유려하여, 풍부한 통찰을 담은 내용과 더불어 글을 읽는 맛을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끌어올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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