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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02 도시와 기억 4
  2. 2010.02.26 베니스엔 창문이 많다.
  3. 2010.02.17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도시와 기억 4

BookToniC 2010. 3. 2. 18:03

여섯 개의 강과 세 개의 산맥 너머에, 한번 방문해 본 사람은 결코 잊지 못하는 도시 조라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도시가, 잊히지 않는 다른 도시들처럼 기억 속에 평범하지 않은 이미지를 남겨놓기 때문에 잊힐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조라는 계속 이어지는 길들, 그 길을 따라 서 있는 집들과 대문들과 창문들을 하나하나 기억에 남기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특별히 아름답거나 특이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조라의 비밀은, 그 어떤 음도 바꾸거나 옮길 수 없는 악보에서처럼 연달아 이어지는 형상들을 바라보는 방식에 있습니다. 그 도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기억하는 여행자는 잠 못 이루는 밤이면 조라의 거리를 걷고 있는 상상을 하며 구리 시계, 이발소의 줄무늬 차양, 아홉 개의 구멍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분수, 천문학자의 유리 탑, 수박 장수의 좌판, 은자와 사자의 상, 터키 식 목욕탕, 모퉁이의 카페, 항구로 향하는 골목이 차례대로 이어지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 도시는 갑옷이나 벌집 같아서 우리는 모두 그것을 이루고 있는 각각의 칸 안에 우리가 기억하고자 하는 것들, 즉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 미덕, 숫자, 식물과 광물의 분류, 전투 날짜, 성좌, 대화의 일부분 같은 것들을 배열할 수 있습니다. 모든 관념과 여정의 각 지점 사이에, 기억을 순간적으로 불러내는 데 이용되는 유사 혹은 대조 관계가 설정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라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도시를 방문하기 위해 떠난 것은 소용없는 짓이었습니다. 보다 더 잘 기억되기 위해 꼼짝하지 않고 똑같은 모습으로 있을 수밖에 없었던 조라는 힘을 잃고 서서히 붕괴되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조라를 잊었습니다.

-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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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ellavita.tistory.com



베니스의 건물 벽은 하늘을 닮았다. 창문을 닮았다. 들판을 닮았다. 벽에 눕고 싶다. 저 벽들을 찢어 넣고 가고 싶다. 모조리 배에 태워 서울로 부치고 싶다.

베니스엔 창문이 많다. 사람 사는 집에는 으레 창문이 있기 마련이겠지만 워낙 엄청난 습기를 안고 사는 도시라 그런지 모든 벽은 태양을 향해 뚫리고 창문이 만들어진다. 창문이 많아서 사람들은 창문에 매달려 산다. 창문에 매달려 빨래를 널고 창문에 매달려 이웃과 얘기를 나누며 창문을 딛고 서서 세상을 보려 한다. 창문을 올려다보며 어린아이가 자라고, 사각 창문에 맞춰 삶이 재단되고 인화된다.

- 이병률, <끌림>, 랜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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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것
떨며 멈칫멈칫 물러서는 山빛에도
닿지 못하는 것
행여 안개라도 끼이면
길 떠나는 그를 아무도 막을 수 없지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것
오래 전에 울린 종소리처럼
돌아와 낡은 종각을 부수는 것
아무도 그를 타이를 수 없지
아무도 그에겐 고삐를 맬 수 없지

- 이성복, <남해 금산>,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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