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기억 4

BookToniC 2010. 3. 2. 18:03

여섯 개의 강과 세 개의 산맥 너머에, 한번 방문해 본 사람은 결코 잊지 못하는 도시 조라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도시가, 잊히지 않는 다른 도시들처럼 기억 속에 평범하지 않은 이미지를 남겨놓기 때문에 잊힐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조라는 계속 이어지는 길들, 그 길을 따라 서 있는 집들과 대문들과 창문들을 하나하나 기억에 남기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특별히 아름답거나 특이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조라의 비밀은, 그 어떤 음도 바꾸거나 옮길 수 없는 악보에서처럼 연달아 이어지는 형상들을 바라보는 방식에 있습니다. 그 도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기억하는 여행자는 잠 못 이루는 밤이면 조라의 거리를 걷고 있는 상상을 하며 구리 시계, 이발소의 줄무늬 차양, 아홉 개의 구멍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분수, 천문학자의 유리 탑, 수박 장수의 좌판, 은자와 사자의 상, 터키 식 목욕탕, 모퉁이의 카페, 항구로 향하는 골목이 차례대로 이어지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 도시는 갑옷이나 벌집 같아서 우리는 모두 그것을 이루고 있는 각각의 칸 안에 우리가 기억하고자 하는 것들, 즉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 미덕, 숫자, 식물과 광물의 분류, 전투 날짜, 성좌, 대화의 일부분 같은 것들을 배열할 수 있습니다. 모든 관념과 여정의 각 지점 사이에, 기억을 순간적으로 불러내는 데 이용되는 유사 혹은 대조 관계가 설정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라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도시를 방문하기 위해 떠난 것은 소용없는 짓이었습니다. 보다 더 잘 기억되기 위해 꼼짝하지 않고 똑같은 모습으로 있을 수밖에 없었던 조라는 힘을 잃고 서서히 붕괴되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조라를 잊었습니다.

-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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