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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5.21 그는 세계를 설계했다.
  2. 2011.05.21 비오는 거리.
  3. 2011.05.20 이룰 수만 있다면.


말에 대한 시인의 과민한 감각에 더러 마음이 서늘해지는 것도 [Love Adagio]를 읽는 재미 가운데 하나다. 명사를 의태어로, 부사적으로 사용하면서 이를 다시 비틀어 걸음의 통통 튀는 느낌을 자아내는 "발. 발, 발, 밤, 밤, 밤"(빨리 걷다) 같은 표현이나, 보이지 않는 것을 또렷이 보게 만드는 "칠월이 가고 팔월이 온다. 여름이 두 다리를 벌리고 굴뚝 위에 올라앉는다."(침묵의 뿌리) 같은 표현 앞에서 내 마음은 서늘하다. 이런 대목들은 [Love Adagio]에 출렁이는 시인의 능변이 겉보기와 달리 세심히 조율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낳는다. 그렇다면 박상순은 조각가가 끌로 돌을 쪼듯 언어로 제 뇌를 쪼아 이 낯선 세계를 조각해낸 것이다. 그는 세계를 재현하지 않고 세계를 설계했다. 창세기의 신神처럼. 과연 새로운 세계다. 아스라한 환幻의 세계, 아슬아슬한 헛것의 세계.

- 고종석, 모국어의 속살,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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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거리.

MusicToniC 2011. 5. 21. 06:24



최근 언론에서 무명가수로 주목받은 강지민의 비오는 거리.

무명가수라는 타이틀이 웃기다. 이름 없는 가수가 어디 있는가. 시인의 말처럼, 우리 모두는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 때를 기다리는 씨앗에 불과하다. 철저한 암흑 속에서, 그 누군가의 간절한 음성으로 인해, 우리는 머뭇머뭇 어둠을 뚫고 숨겨온 단단한 향기와 빛깔을 조심스럽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모두가 무명이며, 또한 언제까지나 무명일 수는 없다. 

대학 신입생 때 잠깐 몸을 담았던 늘푸른소리는 민중가요 동아리였다. 연희관 중앙계단 아래 빈 공간에 자리잡은 동아리방엔 담배연기에 누렇게 쩔은 벽하며 빛바랜 민중가요 악보집이 군데군데, 그들의 삶이자 무기였던 통기타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아늑하지만도 않았지만, 낯설지만도 않았던.

내 발로 그곳을 걸어나오기 직전에는, 동아리에선 현장 논쟁이 한창이었다. 우리는 노동자와 빈민들의 빛과 소금으로, 그들과 연대한 공연을 꺼려서는 안된다는 카랑카랑한 선배의 목소리가, 그리고 그보다는 청송대를, 연희관 앞을, 백양로 삼거리를, 그러니까 운동이 사라져 가는 거리에 다시 떠나는 날 을 열창하고 싶다던 친구의 목소리가, 차근차근 떠오른다. 무겁고 나른하고 치열하지만은 않게, 따분했던 그 날 그 때 그 곳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어느 곳에서도 현장을 느낄 수 없었으므로. 현장이라는 단어가 내게 주는 그림은, 반드시 각목을 든 시위대의 앞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막 임용된 교수의 열정 넘치는 교실만도 아니었고, 근대성을 주제로 와인을 할짝이던 학회 친구들의 앞만도 아니었다. 현장은 가까운 듯 했지만, 조금만 더 생각할라치면 온데간데 없이 멀어지는 야생고양이같은 거.

도대체 현장은 어디에 있었던 걸까.

이제 와 생각해보면,

현장은, 내가 사랑하는 그 이 앞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때 현장이 어디인지를 묻기 전에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묻고 답했으면 좋을 뻔 했다. 우리 자신의 목소리에 조금만 더 귀를 기울였으면 좋을 뻔 했다. 우리의 사랑을 뜨겁게 노래해도 좋을 뻔 했다. 그래도 돌아오는 곳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무겁고 나른하지만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좀 더 웃고, 좀 더 슬퍼하고, 좀 더 사랑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비오는 날, 강지민의 노래를 들으며 백양로를 그린다. 그 때, 사랑하는 이들과 사랑할 이들이 개나리처럼 피어나던 그 때. 꽃잎이 지고 사랑도 지고 터져나오는 눈물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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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룰 수만 있다면.

BookToniC 2011. 5. 20. 05:43

사랑하는 친우親友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의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했네.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더욱 좋겠네.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돈을 의미)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 전태일의 유서 전문, 조경래 저 전태일 평전, 돌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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