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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6.02 지친 반지.
  2. 2011.06.01 두고 온 집.
  3. 2011.05.31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지친 반지.

BookToniC 2011. 6. 2. 04:17

돌아가고픈, 사랑하고픈, 존재하고픈 욕망.
나누어가질 수 없는 두 줄기 물의 싸움에 시달려
죽고픈 욕망이 있다.
삶을 덮어줄 거대한 입맞춤이 그립다.
들끓는 고통이 아프리카에서 끝날 삶.
목숨을 끊어라.

주여! 욕망을 갖고 싶지 않은... 그런 욕망이
있습니다.
신성을 모독하는 손가락으로 당신을 가리킵니다.
마음이 없었더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봄은 돌아, 돌아오고, 다시 떠나리라. 그리고, 신은
세월의 무게로 허리가 휘어져 우주의 등뼈를 지고
그렇게 자꾸자꾸 흘러만 가리라.

관자놀이에서 암울한 북이 울릴 때,
비수에 새겨진 꿈이 아플 때,
이 시에 그대로 머무르고픈 욕망이 있다.

- 세사르 바예호,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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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집.

BookToniC 2011. 6. 1. 04:01

오래 너에게 가지 못했어.
네가 춥겠다, 생각하니 나도 추워.
문풍지를 뜯지 말 걸 그랬어.
나의 여름은 너의 겨울을 헤아리지 못해
속수무책 너는 바람을 맞고 있겠지.
자아, 받아!
싸늘하게 식었을 아궁이에
땔감을 던져넣을 테니.
지금이라도 불을 지필 테니.
아궁이에서 잠자던 나방이 놀라 날아오르고
눅눅한 땔감에선 연기가 피어올라.
그런데 왜 자꾸 불이 꺼지지?
아궁이 속처럼 네가 어둡겠다, 생각하니
나도 어두워져.
전깃불이라도 켜놓고 올 걸 그랬어.
그래도 이것만은 기억해.
불을 지펴도 녹지 않는 얼음조각처럼
나는 오늘 너를 품고 있어.
봄꿩이 밝은 곳으로 날아갈 때까지.

- 나희덕, 야생사과,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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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설계와 성인발달] 이란 수업이 있었다. 심리학 학부전공 수업이었는데, 동글동글 황상민 교수님이 자기 연구실 박사들과 의기투합하여 만든 실험적인 수업이었다. 학기의 반은 발달심리학 이론을 공부하고, 학기의 나머지 반은 사회 각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적응한' 인생의 선배들을 모시고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듣고, 자유롭게 질문하고 답하는 식이었는데, 전반기나 후반기나 과제 수준이 만만치 않았다. 단순히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생애발달의 어떤 시기들을 지나왔는지, 때때로 찾아오는 고난과 역경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강의 전에 미리 꼼꼼하게 분석하고 또 실제 강의가 그런 점에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유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명지병원 이왕준 이사장, AC닐슨 신은희 대표, SM 엔터 정찬환 이사 등이 이 수업을 찾았던 인생 선배들이었다.

박새별씨는 그 수업에서 처음 만났다. 학기 내내 앞자리에 앉아 교수님에게건 연사에게건 질문을 쏟아내던 모습을 기억한다. 수업 특성상 자기고백적인 이야기를 피할 수 없었는데, 조금 부끄러워하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 때 그녀의 고민은,

가수로 살아갈 수 있을까였던 것 같다. 가끔 기성 가수(아마도 루시드폴이었던 것 같다.)의 공연에 피아노 세션으로 참여하곤 하며, 자기는 음악이 너무 좋고 즐거운데, 그 길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했다. 자신의 재능을 아끼는 선배의 도움으로 음반을 준비하고 있는데, 연습할 때마다 부족함을 느낀다고. 두렵다고. 그 때 나는,

막 인도에서 돌아와 아름다운 거짓말 원고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언젠가는 책을 쓰고 싶다고 어렴풋이 생각해 왔었는데, 막상 쓰다보니 생각보다 고역이었다. 필진들을 독려해 짜내고 짜낸 원고를 기껏 가져가면, 출판사 대표는 그 원고를 대학생 레포트 보듯 쉽게 넘겼다. 그러면 그 원고를 주섬주섬 챙겨 갖고 돌아와, 이리저리 굴려도 보고 세워도 봤다. 처음부터 다시, 그리고 또 다시. 분명히 나아지고 있는 게 느껴지긴 했는데, 그게 즐겁지만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모자랐다.

그 때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좋아하면서 살고 싶다고 하는 그 사람이, 어떤 날은 무척 반짝반짝거렸다. 앞을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그의 곁에 남고 싶다고.

2007년의 일이다. 

그리고 2011년의 그 사람은 노래한다. 어딘지 모르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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