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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6.14 필기를 베끼다가;
  2. 2007.02.16 what is the eroticism .?
  3. 2007.02.12 역사철학테제 1, Walter Benjamin

통시적 관계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는 것 의 공시적 관계 공간 비교하는 방법의 역사를 민중사관으로 본다. 각 시대멱 맥락을 살펴보는 것.. 공시적 관계 내적인 체계가 다른 공간과 다른 점을 본다. 구조주의는 반-인본주의를 공유함. 실존주의에 대한 반발로 등장했기 때문에 구조와 후기구조가 반인본주의 공유함 자율적 이성적인 자아에 대한 설명 베버가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 내적 가치체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여기서 자율적 주체적인 자아는 담론적이고 이야기 구조와 관계를 통해 나타난 것이다. 평행/교차사촌 실질적으로 보면 똑같은 사촌관계지만 족외 족내혼으로 보느냐 그것은 관계가 갖고 있는 차이 남자와 여자 그 차이로부터 이해를 하자는 것이다. 반인본주의의 특성!  구조와 후기구조의 큰 공통점 차이에 대해 주목함 대한민국 드라마는 똑같은 이야기 잘사는 남성-청순하고 가난한 여성-못 된 시어머니 같은 내용이겠지만 구조주의 입장에서 보면 소설의 이야기는 다양하지 않고  이야기 구조라는 것은 동일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이다.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심층구조가 변형된 것이지 구조는 같다. 후기구조주의는 심층구조를 부정함. 동형성에 대한 이형성 강조 레비스트링스? 동형적이라고 주장했다면 후기구조주의자는 다양한 문화라고 본다. 미개한 것이 존재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 한 가지 잣대로 노노 언어학적 질서 후기구조주의는 해체적 목표를 추구하는 것 다 해체시키고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냐? 영원한 해체는 가능한 것이냐? 에 대한 의문을 제시함. 없을 때 더 잘 보인다고 말함...

심란하다.

나, 이런 공부 하는 건가?
AND

what is the eroticism .?

BookToniC 2007. 2. 16. 21:12
이것이 에로티시즘이다.

fur-covered cup, saucer, and spoon

Meret Oppenheim
fur-covered cup, saucer, and spoon (1936)


 





* 연결

페로티시즘, 김영애, 2004, 개마고원
AND

1.


역사철학테제, Walter Benjamin,
앙겔루스 노부스


1
사람들 말에 의하며 어떤 장기 자동기계가 있었다고들 하는데,

기계는 어떤 사람이 장기를 두면 그때마다 그 반대 수를 둠으로써

언제나 이기게끔 만들어졌었다. 터어키의상을 하고 입에는 水煙

을 문 인형이 넓은 책상 위에 놓여진 장기판 앞에 앉아 있었다.

거울로 장치를 함으로써 이 책상은 사방에서 훤히 들여다볼 수 있

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장기의 명수

인 등이 굽은 난쟁이가 그 책상 안에 앉아서는 줄을 당겨 인형의

손놀림을 조종하였다. 우리는 철학에서도 이러한 장치에 대응되는

것을 상상할 수가 있다. 항상 승리하게끔 되어 있는 것은 소위 <

역사적 유물론>이라고 불리어지는 인형이다. 이 역사적 유물론은,

만약 그것이 오늘날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그 모습을 밖으로 드러내어서는 안되는 신학을 자기의

것으로 이용한다면, 누구하고도 한판 승부를 벌일 수가 있을 것이

.

 

2

로체에 의하면 인간이 지닌 심성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

는 개별적 사물들에 대한 숱한 이기심과 함께 모든 현재가 일반적

으로 미래에 대해 부러움과 선망을 가지고 있지 않는 데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성찰을 좀더 진전시키면, 우리들이 품고 있는 행복의

이미지라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현재적 삶의 진행과정을 한때 규

정하였던 과거의 시간에 의해 채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들에게서 선망의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행복은, 오로지 우리

들이 숨쉬었던 공기 속, 그러니까 우리가 한때 말을 나눌 수도 있

었던 사람들과 우리들 품에 안길 수도 있었던 여인들과의 관계 속

에서 존재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행복의 이미지 속에는 구원의

이미지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함께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사가 주로 관심을 가지는 과거의 이미지도 이와 동일한 양상을 하

고 있다. 과거는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어떤 은밀한 목록을 함께

간직하고 있다. 우리들 스스로에도 이미 지나가 버린 것과 관계되

는 한줄기의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 귀

에 들려오는 목소리 속에서는 이제 침묵해 버리고 만 목소리의 한

가락 반향이 울려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이 연연하는 여

인들은, 그녀들이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누이들의 모습을 하고 있

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과거의 인간과 현재의 우리들 사

이에는 은밀한 묵계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고 또 우리는 이 지구

상에서 구원이 기대되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앞서 간 모든

세대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도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주어져 있

, 과거 역시 이 힘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로

이러한 요구는 값싸게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적 유물론자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3

사건의 크고 작음을 구별함이 없이 모든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얘기하는 연대기 기술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 즉 이 지상에 어젠

가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도 빠짐없이 역사에서 주목되어야 한다

는 진실에 공정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과거가 완벽하게 기록될

수 있는 것은 인류가 구원되고 난 연후이다. 다시 말해 구원된 인

류만이 그들의 과거의 하나 하나를 남김없이 인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시 되살아나는 과거의 한순간 한순간은 그날, 즉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의 일정표의 인용문이 될 것이다.

 

4

우선 의식주를 얻도록 노력하라. 그러면 신의 왕국은 스스로 열릴

것이다. - 헤겔

 

마르크스에 의해 훈련을 받은 역사가가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계

급투쟁은 조야하고 물질적인 것들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싸움이다.

이러한 싸움없이는 고상하고 정신적인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상하고 정신적인 것들은, 계급투쟁 속에서

승리자의 손에 굴러 떨어진 전리품의 이미지와는 다른 양상을 하

고 있다. 그것은 신뢰, 용기, 유우머, 기지, 불굴성으로서 이러한 투

쟁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또 지나가 버린 머나먼 과거

의 시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덕목들은, 지배자에게

굴러떨어진 일체의 승이에 언제나 새로이 의문을 제시할 것이다.

마치 꽃들이 해를 향하듯, 과거 또한 알 수 없는 종류의 신비스러

운 向日性에 힘입어, 바야흐로 역사의 하늘에 떠오르는 바로 그

해를 향하려고 하고 있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모름지기 모든 변화

들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이러한 사소한 변화에 정통하지

않으면 안된다.

 

5

과거의 진정한 像은 휙 스쳐 지나가 버린다. 다만 우리는, 그것이

인식되어지는 찰나에 영원히 되돌아올 수 없이 다시 사라져 버리

, 마치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상으로서만 과거를 붙잡을 수

있을 뿐이다. <진리는 우리들로부터 달아나 버리지 않을 것이다> -

고트프리트 켈러에서 연원하는 바로 이 말은 역사적 유물론을 관

통하는 역사의 이미지를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현재

에 인식되지 못했던 모든 과거의 상은 언제든지 현재와 함께 영원

히 사라져 버릴 위험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6

지나간 과거의 것을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도대체

어떠했던가>를 인식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은 어떤 기억을 붙

잡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 유물론에서 문제

가 되는 것은, 위험의 순간에 역사적 주체에 예기치 않게 느낫없

이 나타나는 과거의 이미지를 꼭 붙잡는 것이다. 위험은 전통의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전통의 수용자에게도 닥쳐온다. 이 양자는

하나같이 동일한 위험, 즉 지배계급의 도구로 이용될 위험에 직면

하고 있다. 어떠한 시기든, 바야흐로 전통을 압도하려는 타협주의

로부터, 언제나 새로이 전통을 싸워서 빼앗으려는 시도가 행해지

지 않으면 안된다. 메시아는 구원자로서만이 오는 것이 아니다.

는 반그리스도의 극복자로서도 오는 것이다. 과거로부터 희망의

불꽃을 점화할 수 있는 재능이 주어진 사람은 오로지, 죽은 사람

들까지도 적으로부터 안전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투철하게 인식

하고 있는 역사가뿐이다. 그런데 이들 적은 승리를 거듭하고 있다.

 

7

고난과 비참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는 이 골짜기의 암흑과 혹한을

생각하라. - 브레히트, [서푼짜리 오페라]

 

퓌스텔 드 쿨랑지는 역사가에게, 만약 그가 지나간 한 시대를 체

험해 보고자 하면 모름지기 그 후에 일어난 일체의 역사적 진행과

정을 아예 머리에서 떨쳐버릴 것을 권고하고 있다. 역사적 유물론

이 파괴했던 역사방법론의 성격을 이보다 더 단적으로 말해주는

발언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감정이입의 역사방법론인데,

방법론의 근원은 심장의 나태, 즉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진정

한 역사적 이미지를 붙잡는 데 절망함으로써 생겨난 태만이라는

병이다. 중세의 신학자들에게 이 병은 멜랑코리의 근원으로 간주

되었다. 이러한 병에 친숙했었던 플로베르는 <카르타고를 소생시

키기 위해 내가 어는 정도 슬퍼지지 않으면 안되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러한 슬픔의 본질이 무엇인가는 다음과 같은 질문, 즉 역사주의의

신봉자들은 도대체 누구의 마음이 되어 보려고 감정이입을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 본다면 한층 더 명확해질 것이다. 대답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승리자의 마음이 되어 보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런

데 그때마다의 새로운 지배자는 그들 이전에 승리했었던 모든 자

들의 상속자이다. 따라서 승리자의 마음이 되어 본다는 것은 항상

그때마다의 지배자에게 유리하게 됨을 뜻한다. 이로써도 역사적

유물론자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승리를 거듭해온 사람은, 땅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들을 짓밟고 넘어가는 오늘날의 지배자의 개선 행

령에 함께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전리품이란 지금까지 으레 그러

했던 것처럼 이 개선행렬에 함께 따라다닌다. 우리가 문화유산이

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 전리품을 두고 하는 말인 것이다. 이러

한 문화유산을 역사적 유물론자는 일전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비판

적으로 관찰한다고 보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가 문화유산에서

개관하는 것은 하나같이 그에게는 전율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원

천에서 비롯하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문화유산의 현존재는

그것을 창조한 위대한 천재들의 위대한 노고뿐만 아니라, 이름도

없는 동시대의 부역자들의 노고에도 힘입고 있는 것이다. 야만의

기록이 없는 문화란 있을 수 없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한번도 없

. 문화의 기록 자체가 야만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이

사람 손에서 저 사람 손으로 넘어가는 전승의 과정 또한 이와 조

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유물론자는 가능한

한도내에서 이러한 전승으로부터 비켜난다. 그는 결에 거슬리는

역사를 솔질하는 것을 그의 과제로 삼는다.

 

 *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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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넷 링크 (http://go.jinbo.net/commune/view.php?board=marx-7&id=25&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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