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공간 수유+너머 [기억이란 무엇인가] 강좌 2.

2007년 1월 19일에 남산에서 들었고,
황수영 씨의 강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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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송은 보통 형이상학에서 하이데거, 화이트헤드와 함께 다룬다.
한 때 배제되었던 '시간' 을 철학적 논의의 장으로 끄집어낸 이들이다.

강좌는 3시간 가까이 진행되어서 10시 무렵에 끝났다.
처음에는 지루한 느낌이었지만,
논리전개가 깔끔해서 강좌 중반부터는 흥미 지속.

이미지에 대한 개념 전환이 특히 재미있다.
배후에 어떠한 실체도 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의 근대적 문제설정에서 어느 정도 비껴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생물학에 기반한 베르그송의 논의는,
정신은 물질이기 이전에 '생명' 이므로
생명체의 유기적인 특징, 내재된 자기 조직의 특성으로 정신을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뇌의 특정 부분이 특정 기능을, 기억을 담당한다는 환원주의적 입장과 각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의 논의는 어쨌든,
'철학적'이다. 한계는 분명하다.
이후 기억과 정신에 대한 도식은 '정신은 생명이다' 는 전제에서 출발한
그럴듯한 상상이다. (원뿔 도식 같은 것..) 여기에 반증가능성이 존재할까.

.. 철학 내부의 '문법' 에 대한 이해 없이 철학을 '반과학' 으로 밀어붙이는 건
정말 나쁜 버릇이다. 그렇다고 해서 생겨나는 질문을 마음에 쌓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그래서, 공부해야 할 이유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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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네띠네

1. 이미지 개념의 변천


... 플라톤은 모상을 다시 에이콘과 판타스마로 나뉜다. 에이콘 아이콘의 원형으로 복사물 의미한다. 판타스마 복사물을 복사한 , 시뮬라크르. 판타스마는 심상, 이미지라는 의미로 쓰였다. 이런 의미의 판타스마가 중세에 라틴어 이마고 (imago) 번역되었고 이것이 이미지라는 말의 직접적 기원이다.

이에 반해 베르그송은 존재하는 것들 전체를 이미지 부른다. 배후에 어떤 실체도 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간 차원의 철학과 차이가 있다. 대신에 이미지는 지속과 생성의 단면이다. 이미지 배후에 지속이 있다,

베르그송의 이미지는 어떤 것의 모방이 아니다. 존재하는 것은 이미지지만, 이미지의 시간에서의 축적인 기억은 바로 본질이다. 따라서 본질은 초월적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내재한 것이다. 초월성의 철학을 극복하고 내부성의 철학으로 돌아간 것이다.

2. 기억과 자기동일성 철학사 속의 기억


기억은
스스로를 조직하는 특징이 있다
. 기억을 원자로 삼으면 결코 자기동일성을 설명할 없다. 기억이 무기적이라면,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기억은 아무런 관계가 없이 서로를 배재하는, 외재적-외적 관계에 놓이게 된다. 생명체는 자르면 죽는다. 다르다. 유기적 결합은 무기적 결합과는 다르다. 절대 자를 없이 자기 자신으로 하나의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기적 동일성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자체로 내재적인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내재성의 철학은 기본이 생물학이다.


3.
물질과 기억


물질의
지속은 의식 속에서 기억으로 보존된다. 기억이 흐름으로서 남김없이 보존된다고 말한다. 우리의 기억은 눈덩이처럼 모든 것을 보존한다. 의식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기억도 사실은 무의식 (vision panoramique) 속에 보존되어 있다. 이런 무의식은 의식보다 기억에 가깝다. 현재의 주의를 끌지 못할 뿐이다. 문제는 어떻게 과거 기억의 상기가 가능한가, 망각이 어떻게 가능한가의 매커니즘 밝히는 것이다.


* 연결

베르그송 강좌 전문 링크 - revits
01, 02, 03 / 수유+너머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대한 시론, H. Bergson, 최화 옮김, 2005, 아카넷
물질과 기억, H. Bergson, 박종원 옮김, 2005, 아카넷
창조적 진화, H. Bergson, 황수영 옮김, 2005, 아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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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과 기억, 시간의 지층을 탐험하는 이미지와 기억의 미학, 황수영, 2006,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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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프랑스 철학, 황수영, 2005, 철학과현실사

연세대학교 형이상학 강의계획서 (베르그송, 하이데거, 화이트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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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19) 베르그송, 시간의 이미지와 기억의 미학 (황수영)

 

01.
기억이란
주제로 다양한 분야에서 접근.

철학에서 기억은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가. 철학에 관심이 있어야 이해하기 쉽겠다. 철학을 통해 자연과학, 학문과 소통이 되고 있음을 이해하면, 근본적인 의미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좋겠지..

 

물질과 기억을 참고할 . 물질은 이미지고 정신은 기억이다. 서양 철학적으로 물질과 정신은 대립되는, 소통하기 어려운 실체로 파악한다. 특히 근대의 데카르트부터 물질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고, 정신은 외부 세계에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실체라고 여겼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배척하는 모순적인 관계다. 개의 독립적인 실체라고까지 얘기하고 있다. 이를 이원론이라고 한다. 일원론은 정신을 강조하면 관념론, 물질을 강조하면 유물론이다. 데카르트는 둘을 인정을 하고, 물질과 정신은 어떻게 소통하는가를 데카르트 철학의 중심적인 문제로 둔다. 소통을 해야 하는가. 그러나 인간은 정신과 물질이 실체 안에 동시에 녹아 들어가 있다. 경험으로 가지가 소통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원론 철학에서는 원론적으로 설명할 없다. 송과선으로 설명하기도 했으나 생리학적으로 비판을 받고, 애초에 분리된 실체라는 전제에서부터 소통을 이끌어내는 무리라는 비판이 있었다.

 

19c 중반부터 실험생리학이 발전하기 시작한다. 때부터 과학적으로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문제삼기 시작한다. 유물론, 정신이라는 것은 조금 복잡한 뇌의 분자운동에 불과하다는 입장이 증명이 불가하다는 이유로 결정적인 이유가 되지 않았다. (형이상학 : 증명이 되지 않는 철학적 입장) 이는 자연과학에 의해 결정적으로 반박이 되기 시작했다. 브로카는 신경외과 의사다. 전까지 정확히 뇌의 기능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르보르니라는 환자가 브로카를 찾아왔다. 말은 알아듣는데, 땅이라는 말밖에 표현하지 못했다. 해부해보니까 좌측 전두엽의 손실을 확인했다. 좌뇌 앞부분에 언어중추가 있다는 가설을 세웠고, 몇몇 사례들로 올바른 가설로 받아들여졌다. (브로카 실어증) 베르니케에게는 말은 하는데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정반대의 환자가 찾아왔다. 물론 여기에서 말을 한다는 것은 기계적인 말이다. 듣는 것과 말하는 것은 긴밀한 상호 작용이기 때문이다. 역시 해부해서 확인해보니 좌측 전두엽 , 측두엽이 손상되었다. (베르니케 실어증) 다음부터 뇌의 특정 부분이 특정 기능을 담당한다는 가설이 통용되게 되었다. 머리를 200부분으로 나눠서 뇌지도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일종의 결정론이자 유물론이 확립되었다. 이런 입장을 [대뇌 국재화 이론]이라고 한다. [Localization cerebrale] 과연 증명이 되었는가? 물론 시작은 관찰에서 시작하지만, 과학의 논리적 단점은 모든 것을 관찰할 없다는 것이다. 어떤 것은 맞고 어떤 것은 틀리고, 시간이나 상황에 따라 다른 기능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X Y 주장하는 것은 힘들다. 일련의 확인된 경험들로 인해 가설이 믿음이 되고 이론으로 정립되었다. 대뇌 연구의 대부분은 기억에 대한 연구들에 의해서 촉발된다. 과학 분야의 기억 연구는 때가 처음이라고 보면 된다.

 

19c 베르그송은 당시 맹위를 떨쳤던 과학- 심리학, 생리학, 진화론 근본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당시 과학에 민감하게 반응한 철학자다. 베르그송은 과학에 호의적이지만, 과학자의 자생적 형의상학 (과학자 사회, 시대적 전제에서 시작) 대해서는 비판을 한다. 만약 전제가 틀렸을 경우엔 결국 틀렸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전제를 반성하는 것이 철학이니까.. 심리학적으로는 강박에 가까운 자기반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 철학이므로, 과학자들의 연구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베르그송은 6년동안 심리학, 생리학에 대해 공부를 하고 검토하고 철학적 입장에서 비판을 한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물질과 기억은 시간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분석이다. 물질은 이미지고 정신은 기억이다. 

 

기억은 서구 철학 전체에 대한 도전이다. 베르그송 전에는 니체가 있었다. 니체는 고정된 실체나 본질을 주장하는 철학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프랑스에는 니체가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베르그송은 독자적으로 고정된 기억을 뒤집는 작업을 시작한다. 본격적으로 시간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다. 

 

1. 이미지 개념의 변천

우리 인간 밖에서 자연을 좌지우지하는 불변의 절대적 원리는 가정하는 철학을 초월성의 철학이라고 한다. 그것을 베르그송은 공간에 귀속시킨다. 공간은 변화하지 않는 , 기본 바탕과 같은 것이다. 철학은 우리가 정신적으로 안주할 초월적 원리를 가정하고 시작했다는 관점이다. , 이데아, 데카르트의 실체와 관련된 불변부동의 원리를 공간 차원에서 정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실재 (reality) 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재는 시각 차원에서 성립한다. 때까지 존재했던 모든 형이상학을 공간 차원에서만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 정말로 존재하는 것은 시간이다. 그렇다면 시간의 존재론은 무엇일까..? 베르그송의 직접 주어진 것들에 대한 시론, 창조적 진화 까지 관통하는 주제 시간이다. 물질과 기억은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베르그송 존재하는 것들 전체를 이미지 부른다. 배후에 어떤 실체도 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간 차원의 철학과 차이가 있다. 대신에 이미지는 지속과 생성의 단면이다. 이미지 배후에 지속이 있다, 이데아가 있다는 것은 틀린 것이다. 지속, 시간과 이미지 사이의 관계가 이어져 있다는 의미다. 이미지는 순간적으로 짜르고, 쪼갠 것이다. 이미지는 환상이 아니고 실재의 일부, 단면이라는 주장이다. 이미지는 환상과 비슷한 함축적 의미를 가져서, 실재가 아닌, 헛것으로 통용되는 공간의 철학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탈레스는 만물은 물이다, 했다. 의미는 현상중의 하나인 물이라는 아니라, 우리의 배후엔 하나의 원리가 있다는 의도를 갖는 것이다. 배후에 실체가 있다는 - 철학은 현상을 부정하므로 출발부터 이원론이 있다. 그것이 자연과학의 정신이기도 하다.

 

베르그송은 시간과 기억을 구분한다. 기억은 주체가 있기 때문이다. , , 모든 생명체들은 기억을 갖고 있다. 생명의 존재 자체가 기억을 갖고 있다. 시간이 없다면, 성장은 불가능하다. 어떤 사건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 기억이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노화되고 죽을 때까지의 시간이 바로 기억이다.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만 기억을 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기억을 통해 자신을 지탱하고 있다고 말할 있다. 자기가 차지한 시간이 자신의 기억이고 기억이 자신이다. 따라서 정의상, 기억의 일부가 물리적으로 상실되면 그것은 이상 과거의 자신이 아니다. 따라서 기억은 본질이며, 이데아이며, 실체다. (기억은 자기동일성을 같는주체와 동일한 의미?) 만약 기억이 이데아라고 ,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붉음의 이데아는 불가침 영역에 있다. 세계는 분리되어 있으므로, 플라톤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를 이미지의 세계라고 한다. 본질과 그것의 나타남을 현시라고 한다. 본질과 현시의 세계는 다를 수밖에 없다. 베르그송의 이미지는 어떤 것의 모방이 아니다. 존재하는 것은 이미지지만, 이미지의 시간에서의 축적인 기억은 바로 본질이다. 따라서 본질은 초월적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내재한 것이다. 초월성의 철학을 극복하고 내부성의 철학으로 돌아간 것이다. (들뢰즈의 철학) -> 철학사적 의미

 

1. 이미지 개념의 변천

실체와 관념의 중간이 이미지, 중립적 용어를 채택했다. 그러나 전통철학에서는 어색하고 홀대를 받는 용어였다. 부분이 물질과 기억 (1896) 1장인데, 주목 받지 못했고 2, 3번째 책이 각광을 받았다.

 

이해를 위해 철학사를 보자. 플라톤은 원본과 모상의 세계를 구분한다. 티마이오스와 데미우르고스 신화는 이데아의 세계를 모방해서 현상계를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데미우르고스는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 장인이라는 의미다. 만든다고 하는 것은, 지적인 계획-청사진과 재료가 있어서 청사진에 따라 세계를 조립한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합리적인 구조를 전제한다. 비합리적인 일은 일어날까? 비합리적이고 유동적인 혼돈의 세계는 본질이 아니다. 모상은 다시 에이콘과 판타스마로 나뉜다. 에이콘 아이콘의 원형으로 복사물 의미한다. 판타스마 복사물을 복사한 , 시뮬라크르.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를 모방하는 것이 있고 질서가 없는 종류가 있다고 주장하고, 가지를 올바르게 구분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기하학 에이콘을 가장 보여준다고 믿었다. 지금 시각으로는 수리물리학이다. 인문학은 진리를 모방하기 보다, 자기 멋대로 발전하는 것으로 홀대할 수밖에 없었다. 

*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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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거부한다. 이데아는 현상계 밖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데아 대신 에이도스를 쓴다. 에이도스는 형상을 의미한다. 형상은 구체적 사물들의 내부에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위계질서에 의해서 이데아를 얼마나 모방하였는지가 문제였다. 형상은 나의 물질적인 부분과는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를 낮은 단계로 보고, 틀에 해당하는 것을 형상, 높은 것으로 본다.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과 정신에 위계적 질서를 부여한 것이다. 형상은 나를 만들지만 내가 형상에 개입하지는 못한다. 형상은 모든 사람에게 있으니 보편적인 것이다. 형상은 보편적인 것에 한해서는 나를 나이게끔 하는 능동적인 작용의 산물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감각을 통해 사물의 형상을 인식한다. 당시 일상에서 판타스마는 감각을 통해 우리 안으로 들어온 외부 대상의 형상이 기억으로 남아 있는 흔적이다. 판타스마는 심상, 이미지라는 의미로 쓰였다. 이런 의미의 판타스마가 중세에 라틴어 이마고 (imago) 로 번역되었고 이것이 이미지라는 말의 직접적 기원이다.  그래서 우리가 쓰는 이미지는 언제나 판타스마라는 의미다.

그런데 플라톤의 이미지는 다른 길을 통해, 본질이라는 원래 의미를 잃고, 우리 내부에 있는 ‘관념’으로 데카르트에게 전해진다. Cogito ergo sum 일 때, 내부는 idea 의 세계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외부의, 초월적 세계에 존재하는 것인 반면 데카르트는 내부에 존재하는 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내부의 관념이 밖에 있는 세계를 그대로 포착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아까 붉은 꽃을 봤을 때, 붉음과 내부에 있는 붉음이 같은 의미가 된 것이다. 관념과 이미지는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중요!!!) 관념, 이미지, 표상은 근대에는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관념과 표상은 마음에 나타난 것이고 우리가 알 수 있는 최초의 대상으로 인식의 기초가 된다.

고대의 이데아는, 외부에 대한 실재론이었다. 근대에 오면서 의식의 세계로 바뀐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자면서, 근대 이전과 이후를 구분할 필요를 느낀다. 고대, 중세의 철학이 과학을 저해한다고 파악한 것이다. 그래서 회의의 철학을 제기한 것이다. 밖에 무엇이 있는지 없는지는, 이미지, 관념이라는 필터를 통해 들어오는 것이지 그 자체가 내게로 들어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의식의 철학은 데카르트가 관념론자가 아닌 것과는 관계없이 관념론의 기초가 된다. 실재론은 근대에서 관념론으로 바뀌는 것이다. 고대의 인식의 기초는 아이디어, 본질이고 근대 관념론의 기초도 의식이지만 본질인지는 모르는 것이다. 의식이라는 둘레를 치고 외부, 대상은 실제로 존재하는지의 문제로 바뀌었다. 이것이 유아론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 바다를 건널 것인가? 철학사적으로 보면 이야기로 재미있을지는 모르지만, 인식론에 대한 문제를 남긴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관념밖에 없지만, 그런 관념을 아는 나는 의심할 수 없는 불변의 자아, 실체다.. 가 데카르트의 결론이다. 나, 혹은 이데아라는 실체를 가정한다는 점에서 플라톤과 데카르트는 같다. (어떤 측면에서 보는가에 따라 다르게 혹은 같게 묶일 수가 있다.)

이미지는 실체가 아닌 현상이다. 현상 배후에 다른 것이 있는가? 이미지는 생성의 순간적인 단면이다. 시간을 점하는 것이 기억이고, 모든 순간적인 것- 행위는- 이미지에 불과하다. 이미지는 공간축의 세계다. 공간의 철학자들은 공간을 절대화시켰다. 진짜 존재하는 것은 시간인데 이미지의 세계인 공간만이 우리에게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많은 철학사가들이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얘기한 것이다. 이것은 과학사가 아니라 철학사다. 인간의 성숙 과정인데, 철학은 이전의 것을 비판하면서 시작한다. 이미 플라톤은 카르미네데스를 비판하면서 자신을 친부살해범이라고 한다. 많은 것을 얻었지만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에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보다 진리가 중요하다는 말을 택한다. 이전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권위에 눌린 것이다. 서양 사상은 비판, 끝없는 친부살해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동양 사상은 권위를 비판하기 보다 해석을 붙이는 과정, 따라서 고전 해석이 중요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동양 사상은 전면적인 비판이 없었다는 것이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 는 이전의 모든 철학에 대한 사형 선고다. 베르그송의 공간의 철학은 일종의 신이다. 비판은 속성상, 나중 사람이 유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중 사람이 꼭 옳은 것은 아니다. 이전 바로 이전 (이이전) 사상을 통해 이전을 비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상은 계속 발전하는 우상향의 그래프로 파악할 수 없다. 고전은 시대가 변하기 때문에 다시 재생의 가능성을 가진다. 그 시대에 종속된 것은 고전이 아니라 유행에 그친다.

2. 기억과 자기동일성 – 철학사 속의 기억

기억이 본격적으로 철학사의 중요한 테마로 등장한 것은 흄부터다. 데카르트는 완벽성이 주제다. 회의할 수 없었던 것은 내가 회의할 수 없다는 그 사실, 즉 내가 사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내가 생각하므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 생각한다는 것은 순간적으로 파악된 진리다. 그렇다면 이 다음순간에도 그럴 수 있는가? 영속성을 보장해주는 진리가 아니다. 

데카르트는 자아를 실체라 했는데, 실체란 존재하기 위해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다. 정신의 본성은 사유이고 사유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순간창조설이다. 그렇다면 영속성은 어떻게 보장하는가? 다음 순간은 어떤가? 내가 자고 있을 때에도 나는 생각하는가? (무의식일 때도 나인가라는 물음) 아니, 오직 내가 생각하고 있을 때만 나다. 여기에서 기묘하게 신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신이 보장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매순간 창조된다는 순간창조설로 극복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기억이 나의 영속성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기억은 불완전하다고 생각했다. 기억은 어떻게든 왜곡된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무오류의 진리다. 그래서 자기동일성 문제에서 기억을 배재한 것이다. 이런 강박은 진리에 대한 수학적 확실성에서 비롯된다. 수학적 확실성이 불완전한 기억에 기초할 수는 없는 것이다. 플라톤은 외부의 진리, 이데아에 의지해서 오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데카르트에게, 내 의식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순간밖에 없다. 순간과 순간을 이어주는 것은 신적인 힘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수학적 확실성이 모든 것의 표본이 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신을 끌어들인 것이다. 사실 기독교적 신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론은, 언제 어디서나 같은, 불변의 보편적 진리이기 때문에 (오로지 진리를 위한 not 믿음) 신이 필요한 것이다. 진리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는 데카르트와 플라톤은 같은 줄에 있다.

일반적으로 근대철학을 대륙의 합리론과 경험론으로 나눈다. 경험론자들의 의심은 한 술 더 떴다. 섬나라에서, 무역을 업으로 하다 보면 신중하고 의심이 많아지게 마련이다. (..ㅡ_) 오로지 확실한 것은 내가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본 것, 감각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장 확실한 것은, 수학적인, 이성만이 파악할 수 있는 진리밖에 없다는 플라톤, 데카르트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단 한순간도 같은 것이란 없다는, 원칙이 있다는 입장이 합리론의 입장이다. 경험론자들은 원칙이란 가장, 요구에 불과하며 실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감각이라고 주장한다. 기억은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이다. 즉, 내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면 나는 내가 아닌 것이다. 이렇게 기억은 언제나 자기동일성 (identity) 과 연결되어 있다. 데카르트는 나는 의심할 수 없는 실체라고 파악했다. 본질적으로 데카르트는 진리가 의심하지 않다는 점에서 낙관론자다. 그래서 방법론적 회의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경험론자들은 진리란 없다,고 얘기한다. 감각은 불확실하지만, 감각에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내가 나이기 위해서 수학적 확실성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경험론자들은 회의적이면서 겸손한 특징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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