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8

억눌린 자들의 전통이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교훈은, 우리들

이 오늘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비상사태>라는 것이 예외가 아니

라 상례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인식에 상응하는 역사의 개념

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비상사태를 도래

시키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는 것이 명약관화해질 것이고, 그리고

이를 통해 파시즘에 대한 투쟁에서 우리가 갖는 입장도 개선될 것

이다. 파시즘이 승산이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반대자들이 진

보라는 이름을 하나의 역사적 규범으로 삼아 이를 들고 파시즘에

맞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지금 체험하고 있는 일들이 20

기에 들어선 오늘날에도 <여전히>가능할 수 있다는 놀라움은 결코

철학적 즐거움이 아니다. 이러한 놀라움은, 그러한 놀라움을 생겨

나게 하는 역사관이 지탱될 수 없다는 인식이 전제되지 않으면 인

식의 출발점이 되지 못한다.

 

9

나의 날개는 날 준비가 되어 있지만 나는 기꺼이 되돌아가고 싶었

. 왜냐하면 비록 내가 영원히 머물더라도 나는 행복이 갖지 못

할 테니까. - 케르숍 숄렘, [천사의 인사]

 

클레가 그린 새로운 천사라고 불리우는 그림이 하나 있다. 이 그

림의 천사는 마치 그가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금방이라

도 멀어지려고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묘사되어 있다. 그 천

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있고, 그의 입은 열려 있으며 또 그의 날개

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도 바로 이렇게 보일 것임에 틀림없

. 우리들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바

로 그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쉬임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을 바라보고

있다. 천사는 머물러 있고 싶어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깨우고 또

산산히 부서진 것을 모아서는 이를 다시 결합시키고 싶어한다.

러나 천국으로부터는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또 그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록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

는 그의 날개를 더 이상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

리고 있는 미래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도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10

수도원이 수사들에게 명상을 위해 규율로서 정하고 있는 대상들은

이 세상과 속세의 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금 우리가 추적하고 있는 생각들도 이와 유사한 목적에서 나온 것

이다. 오늘날 파시즘의 반대자들이 희망을 걸었던 정치가들이 파

시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들 자신이 내걸었던 大義를 저버림으

로써, 그들의 패배를 확인하고 있는 이 마당에서, 이러한 생각들이

노리는 바는, 이들 정치적 현세주의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쳐놓은

함정의 올가미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 있다. 이러한 관찰은,

들 현실적 정치가들의 진보에 대한 고집스러운 믿음과 <대중기반>

에 대한 신뢰,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사회적 정치적 기구에 대

한 노예 같은 맹종과 동화가 실제로는 동일한 내용의 세 가지 양

상에 불과하다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관찰은 또한, 이들

정치가들이 계속 고수하고 있는 역사관과 일체의 복잡한 마찰을

기피하는 하나의 역사관을 위해서 우리들의 관습적 사고가 얼마난

높은 대가를 치리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한번 보여 주고자 하는 것

이다.

 

11

처음부터 사회민주주의에 깊이 자리잡고 있던 타협주의는 그들의

정치적 전략에서뿐만 아니라 그들의 경제관에도 그대로 남아 있

. 후에 사회민주주의가 겪는 파국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바로

이 타협주의이다. 시대의 물결을 타고 나아간다는 생각만큼 독일

의 노동자계급을 타락시킨 것은 없다.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부터,

기술의 발달과정 속에 들어 있는 공장노동이 하나의 정치적 과업

을 수행하리라는 환상에 이르기까지는 그야말로 오십보 백보이다.

해묵은 프로테스탄트적 노동윤리는 독일인들 사이에서 세속화된

형태로 그 부활을 맞이하게 된다. 고타강령은, 노동을 모든 부와

문화의 원천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이미 이러한 혼란의 흔적을 내포

하고 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챈 마르크스는 <자신의

노동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인간은 소유주가 된 다

른 인간들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고 말함으로써 이러

한 견해를 반박하였다. 이러한 반박에도 불구하고 혼란은 점점 확

대되었고, 그 후 곧 요셉 디츠겐은 <노동은 새로운 시대의 구세주

이다. 노동의 조건이 개선되면 지금까지 그 어떤 구원자도 성취하

지 못했던 부가 생겨날 것이다>라고 공언하였다. 노동의 본질에

대한 이러한 통속적인 마르크스즘적 견해는, 노동자들이 그들의

노동에 의해 만들어낸 생산품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한

은 그것이 어느 정도 그들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가를 깊이 생

각해 보지 않은 사고의 소산이다. 이러한 견해는 다만 자연통제의

진보만을 생각하고 있을 뿐 사회의 퇴행은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있

. 그것은 이미 그 뒤 우리가 피시즘에서 마주치게 될 기술주의

적 특징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들 특징 중의 하나는 1948

7월 시민혁명 이전의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에서 유래되었던 자

연개념과는 구별되는 불길한 조짐을 예고하는 자연개념이다. 이런

식으로 이해된 노동개념은 결과적으로 자연의 착취로 귀결되는데,

사람들은 순진하게도 자연의 착취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와 대

립되는 것으로 파악, 이에 만족하고 있다. 이러한 실증주의적 견해

와 비교해 본다면 자주 조소의 대상이 되어온 푸리에 식의 환상은

놀랍고도 건강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푸리에에 따르면 사회적 노

동이 효과적으로 짜여진다면 종국적으로는 네 개의 달이 지구의

밤을 대낮같이 밝힐 것이고, 남북극의 빙하가 녹을 것이고, 바닷물

은 더 이상 짜지 않을 것이고 또 맹수들은 사람들의 명령에 순종

하게씀 되어있다. 이러한 것들는 모두 자연을 착취하는 것과는 거

리가 멀게, 오로지 잠재적 가능성으로서 창조물의 모태 속에 잠자

고 있는 자연을 창조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노동의 한 예를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다. 디츠겐이 표현했던 바의 <공짜로 거기에

존재하는>자연은 이러한 타락한 노동의 개념을 보완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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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넷 링크 (http://go.jinbo.net/commune/view.php?board=marx-7&id=25&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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