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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2.12 역사철학테제 2, Walter Benjamin
  2. 2007.02.12 역사철학테제 3, Walter Benjamin
  3. 2007.02.01 학계의 금기를 찾아서

2.
 


8

억눌린 자들의 전통이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교훈은, 우리들

이 오늘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비상사태>라는 것이 예외가 아니

라 상례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인식에 상응하는 역사의 개념

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비상사태를 도래

시키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는 것이 명약관화해질 것이고, 그리고

이를 통해 파시즘에 대한 투쟁에서 우리가 갖는 입장도 개선될 것

이다. 파시즘이 승산이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반대자들이 진

보라는 이름을 하나의 역사적 규범으로 삼아 이를 들고 파시즘에

맞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지금 체험하고 있는 일들이 20

기에 들어선 오늘날에도 <여전히>가능할 수 있다는 놀라움은 결코

철학적 즐거움이 아니다. 이러한 놀라움은, 그러한 놀라움을 생겨

나게 하는 역사관이 지탱될 수 없다는 인식이 전제되지 않으면 인

식의 출발점이 되지 못한다.

 

9

나의 날개는 날 준비가 되어 있지만 나는 기꺼이 되돌아가고 싶었

. 왜냐하면 비록 내가 영원히 머물더라도 나는 행복이 갖지 못

할 테니까. - 케르숍 숄렘, [천사의 인사]

 

클레가 그린 새로운 천사라고 불리우는 그림이 하나 있다. 이 그

림의 천사는 마치 그가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금방이라

도 멀어지려고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묘사되어 있다. 그 천

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있고, 그의 입은 열려 있으며 또 그의 날개

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도 바로 이렇게 보일 것임에 틀림없

. 우리들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바

로 그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쉬임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을 바라보고

있다. 천사는 머물러 있고 싶어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깨우고 또

산산히 부서진 것을 모아서는 이를 다시 결합시키고 싶어한다.

러나 천국으로부터는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또 그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록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

는 그의 날개를 더 이상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

리고 있는 미래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도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10

수도원이 수사들에게 명상을 위해 규율로서 정하고 있는 대상들은

이 세상과 속세의 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금 우리가 추적하고 있는 생각들도 이와 유사한 목적에서 나온 것

이다. 오늘날 파시즘의 반대자들이 희망을 걸었던 정치가들이 파

시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들 자신이 내걸었던 大義를 저버림으

로써, 그들의 패배를 확인하고 있는 이 마당에서, 이러한 생각들이

노리는 바는, 이들 정치적 현세주의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쳐놓은

함정의 올가미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 있다. 이러한 관찰은,

들 현실적 정치가들의 진보에 대한 고집스러운 믿음과 <대중기반>

에 대한 신뢰,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사회적 정치적 기구에 대

한 노예 같은 맹종과 동화가 실제로는 동일한 내용의 세 가지 양

상에 불과하다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관찰은 또한, 이들

정치가들이 계속 고수하고 있는 역사관과 일체의 복잡한 마찰을

기피하는 하나의 역사관을 위해서 우리들의 관습적 사고가 얼마난

높은 대가를 치리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한번 보여 주고자 하는 것

이다.

 

11

처음부터 사회민주주의에 깊이 자리잡고 있던 타협주의는 그들의

정치적 전략에서뿐만 아니라 그들의 경제관에도 그대로 남아 있

. 후에 사회민주주의가 겪는 파국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바로

이 타협주의이다. 시대의 물결을 타고 나아간다는 생각만큼 독일

의 노동자계급을 타락시킨 것은 없다.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부터,

기술의 발달과정 속에 들어 있는 공장노동이 하나의 정치적 과업

을 수행하리라는 환상에 이르기까지는 그야말로 오십보 백보이다.

해묵은 프로테스탄트적 노동윤리는 독일인들 사이에서 세속화된

형태로 그 부활을 맞이하게 된다. 고타강령은, 노동을 모든 부와

문화의 원천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이미 이러한 혼란의 흔적을 내포

하고 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챈 마르크스는 <자신의

노동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인간은 소유주가 된 다

른 인간들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고 말함으로써 이러

한 견해를 반박하였다. 이러한 반박에도 불구하고 혼란은 점점 확

대되었고, 그 후 곧 요셉 디츠겐은 <노동은 새로운 시대의 구세주

이다. 노동의 조건이 개선되면 지금까지 그 어떤 구원자도 성취하

지 못했던 부가 생겨날 것이다>라고 공언하였다. 노동의 본질에

대한 이러한 통속적인 마르크스즘적 견해는, 노동자들이 그들의

노동에 의해 만들어낸 생산품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한

은 그것이 어느 정도 그들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가를 깊이 생

각해 보지 않은 사고의 소산이다. 이러한 견해는 다만 자연통제의

진보만을 생각하고 있을 뿐 사회의 퇴행은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있

. 그것은 이미 그 뒤 우리가 피시즘에서 마주치게 될 기술주의

적 특징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들 특징 중의 하나는 1948

7월 시민혁명 이전의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에서 유래되었던 자

연개념과는 구별되는 불길한 조짐을 예고하는 자연개념이다. 이런

식으로 이해된 노동개념은 결과적으로 자연의 착취로 귀결되는데,

사람들은 순진하게도 자연의 착취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와 대

립되는 것으로 파악, 이에 만족하고 있다. 이러한 실증주의적 견해

와 비교해 본다면 자주 조소의 대상이 되어온 푸리에 식의 환상은

놀랍고도 건강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푸리에에 따르면 사회적 노

동이 효과적으로 짜여진다면 종국적으로는 네 개의 달이 지구의

밤을 대낮같이 밝힐 것이고, 남북극의 빙하가 녹을 것이고, 바닷물

은 더 이상 짜지 않을 것이고 또 맹수들은 사람들의 명령에 순종

하게씀 되어있다. 이러한 것들는 모두 자연을 착취하는 것과는 거

리가 멀게, 오로지 잠재적 가능성으로서 창조물의 모태 속에 잠자

고 있는 자연을 창조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노동의 한 예를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다. 디츠겐이 표현했던 바의 <공짜로 거기에

존재하는>자연은 이러한 타락한 노동의 개념을 보완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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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2

우리는 역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식의 정원에서 소일

하는 무위도식자들이 역사를 필요로 하는 것과는 달리 역사를 필

요로 한다. - 니체, [삶을 위한 역사의 유용성와 단점]

 

역사적 인식의 주체는 투쟁하는 피지배계급 자신이다. 마르크스에

있어서는 이 계급은 패배한 세대의 이름으로 해방의 과업을 마지

막까지 수행하는 억압받고 또 복수하는 최후의 계급으로 등장한

. 스파르타쿠스에서 다시 한번 잠깐 나타났던 이러한 의식을 사

회민주주의자들은 언제나 혐오하였다. 30여년이 경과하는 동안 그

들은, 지난 세기를 규합하고 뒤흔들었던 블랑키와 같은 목소리와

이름을 말살하는 데 성공하였다.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자계급에 다

가올 미래 세대의 구원자의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이에 자족하였

, 또 이로써 노동계급으로부터 그들이 지닌 가장 큰 힘의 원천

이 심줄을 잘라 버렸던 것이다. 노동계급은 이러한 훈련과정에서

곧 증오와 희생정신을 망각하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증오와 희생

정신은 해방된 손자들의 이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짓밟히고 억눌린

선조들의 이미지에 의해 자라고 북돋아지기 때문이다.

 

13

날로 우리의 목적은 더 분명해 가고 또 날로 국민들은 더 영리해

질 것이다. - 요셉 디츠겐, [사회민주주의의 철학]

 

사회민주주의 이론은 물론이고 그 실천도 한층 더 현실에 근거한

진보의 개념이 아닌 교조적 요구를 지닌 진보의 개념에 의해 규정

되어 왔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머리 속에서 그려왔던 진보는 무

엇보다도 인류 자체의 진보(인류의 기술과 지식의 진보만이 아닌)

를 의미하였다. 둘째로 그들이 생각한 진보는 아직도 완결되지 않

은 진보(인류의 무한한 완벽성의 가능성에 상응하는)를 의미하였

. 셋째로 그것은 또 근본적으로 끊임없이 발전하는 진보(직선 내

지 나선형을 그으면서 자동적으로 나아가는 진보)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속성들은 모두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또 이들 속성

각각에는 비판을 가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

, 그것이 가차없는 비판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모든 속성들의

배후를 꿰뚫어보아야 하고 또 이들 속성의 공통점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데 주안점을 두지 않으면 안된다. 인류의 역사적 진보라

는 개념은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을 관통하는 역사적 발전과정이

라는 개념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진보라는 개념에

대한 비판의 바탕은 이러한 역사적 발전과정이라는 개념에 대한

비판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14

근원은 목표이다. - 칼 크라우스, [운문으로 된 말들]

 

역사는 어떤 구성이나 구조물의 대상인데, 이 구조물이 설 장소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현재시간>

에 의해 충만한 시간이다. 그래서 로베스피에르에게는 고대의 로

마는 현재시간에 의해 충전되어진 과거였다. 프랑스혁명은 스스로

를 다시 태어난 로마로 이해하였다. 프랑스 혁명은 고대의 로마를,

마치 유행이 지나간 의상을 떠올리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기억

하고 회상시켰다. 유행은 무엇이 현실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낌새

채는 -그것이 아무리 지나간 과거의 덤불 속에 있더라도 -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를테면 과거를 향해 내딛는 호랑이

의 도약이다. 다만 이 도약은 지배계급이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는

원형경기장에서 일어나고 있을 따름이다. 역사의 자유로운 하늘에

서 펼쳐질 이와 동일한 도약이 바로 마르크스가 혁명으로 파악한

변증법적 도약인 것이다.

 

15

역사의 연속성을 폭파시키고자 하는 의식은, 행동을 개시하려는

순간의 혁명적 계급에 고유한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은 새로운 달

력을 도입하였다. 이 새로운 달력의 첫날은 역사의 저속도 촬영기

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기억의 날로서 국경일의 모습을 하고

언제나 다시 되돌아오는 그 날은 따지고 보면 항상 동일한 날인

것이다. 따라서 달력은 시계처럼 시간을 계산하고 있지 않다. 그것

은 백년 이래 유럽에서는 그 가장 희미한 흔적조차도 드러내지 않

았던 역사의식의 기념비이다. 이러한 역사의식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었던 것은 1848 7월혁명 동안에 일어났던 돌발적 사건에

서였다. 투쟁의 첫날밤에 파리의 여러 곳에서 상호간에 아무런 관

련도 없이 독자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시계탑에 총격이 가해졌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아마 시의 압운에 힘입어 그의 통찰력을

획득했다고 생각되는 이 사건의 어는 증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

. <누가 믿을 것인가? 들리는 말에 의하면 모든 시계탑 밑에 서

있던 새로운 여호수아가 마치 시간이 못마땅하기라도 하듯이 시계

판에 총을 쏘아 시간을 정지시켰다고 한다.>

 

16

역사적 유물론자는 과도기로서의 현재의 개념이 아니라 시간이 그

속에 머물러 정지상태에 이르고 있는 현재의 개념을 포기할 수 없

. 그 까닭은 이와 같은 현재의 개념에 의해서만 역사를 쓰고 있

는 현재가 정의되기 때문이다. 역사주의가 과거의 <영원한> 이미

지를 나타낸다면 역사적 유물론자는, 일회적인 과거와의 유일무이

한 경험을 보여준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과거의 영원한 이미지 따

위는 역사주의의 유곽에서 <옛날옛적>이라고 불리우는 창녀에게

정력을 탕진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맡겨버리고, 대신 그는 자신

의 힘을 스스로 제어하면서 역사의 지속성을 폭파시키기에 충분한

힘을 가진 남자로 계속 남아 있는 것이다.

 

17

역사주의가 보편적 세계(인류)사에서 그 정점을 이루는 것은 당연

하다고 할 수 있다. 유물론적 역사서술은 방법론적으로, 어떠한 다

른 종류의 역사보다는 바로 이러한 보편사와 비교해 보면 아마 가

장 명확히 구별될 것이다. 보편적 세계사는 아무런 이론적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다. 보편사의 방법론은 첨가적이다. 그것은 동질적

이고 공허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 사실의 더미를 모으는 데 급급

하다. 유물론적 역사서술은 이와는 반대로 하나의 구성원칙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사고에는 생각의 흐름만이 아니라 생각의 정지

도 포함된다. 사고는, 그것이 긴장으로 충만된 사실의 배열 속에서

갑자기 정지하는 그 순간에 그 사실의 배열에 충격을 가하게 되고

또 이를 통해 사고는 하나의 단자로서 결정화된다. 역사적 유물론

자는, 그가 단자로서 마주 대하는 역사적 대상에만 오로지 접근한

. 이러한 단자의 구조 속에서 그는 사건의 메시아적 정지의 표

, 달리 말해 억압된 과거를 위한 투쟁에서 나타나는 혁명적 기

회의 신호를 인식한다. 그는 동질적이고 공허한 역사의 진행과정

을 폭파시켜 그로부터 하나의 특정한 시기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과거를 인지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는 시대로부터는 하나의 특

정한 삶을, 일생의 사업으로부터는 하나의 특정한 사업을 획득하

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으로부터 얻게 되는 수확은 한 작

품 속에 필생의 업적이, 필생의 업적 속에는 한 시대가, 그리고 한

시대 속에는 전체 역사의 진행과정이 보존되고 지양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파악되어진 것의 영양이 풍부한 열매는, 귀중하지만

맛이 없는 씨앗으로서의 시간을 그 내부에 간직하고 있다.

 

18

<이 지구상의 유기적 생물체의 역사와 비교한다면 호모 사피엔스

의 보잘 것 없는 오천년 역사는 이를테면 하루의 24시간 중의 마

지막 2초와 같은 것이고 또 이러한 기준으로 두고 보면 문명화된

인류의 역사는 기껏해야 하루의 마지막 시간의 마지막 초의 5/1

지나지 않는다.>라고 어느 현재의 생물학자는 말한 바 있다. 메시

아적 현재시간의 모델로서 전 인류역사를 엄청나게 축소해서 포괄

하고 있는 현재시간은 우주 속에서 인류의 역사가 만든 바로 그

형상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附記

 

A

역사주의는 역사의 여러 상이한 계기 사이의 인과관계를 정립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사실도 그것이 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해서 역사적 사건이 되는 법은 없다. 원인으로서의 사

실은, 수천년이라는 시간에 의해 그 사실과는 동떨어져 있을 수도

있는 사건들을 통해서 추후에 역사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

제에서 출발하는 역사가는 사건들의 계기를 마치 염주를 하나 하

나 세듯 차례차례로 이야기하는 것을 중지하고 그 대신 그가 살고

있는 자신의 시대가 지나간 어느 특정한 시대와 관련을 맺게 되는

상황의 배치와 파악한다. 이렇게 해서 그는 메시아적 시간의 단편

들로 점철된 <현재시간>으로서의 현재라는 개념을 정립하게 되는

것이다.

 

B

시간으로부터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했던

점술가들은 확실히 시간을 동질적 시간으로도 또 공허한 시간으로

도 체험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은 어

쩌면 과거의 시간이 어떻게 기억을 통하여 체험되어졌던가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지하다시피 유대인에게는 미래를 연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유대인의 경전인 토라와 그들의 기도는 이와는

반대로 기억을 통하여 미래가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이러한 기억은 유대인들로부터, 점성가들에게서 가르침을 얻으려

는 사람들이 빠져들었던 마력적 힘을 박탈하였다. 하지만 그렇다

고 해서 유대인에겐 그로 인해 미래가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미래 속에서는 매초 매초

가 언제라도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었던 조그만 문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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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의 강성민 기자가 쓴 "학계의 금기를 찾아서" 적바림.

중도 2층 구석에서 살림지식총서 [학계의 금기를 찾아서] 발견.

홀홀 넘겨본 내용은 각 분야 전공자들에게 비판받거나 무시당할 소지가 다분하다.
도서관에 비치된 책은 정의감에 불타는 이들의 '낙서' (내용과 형식이 딱 그수준) 로 지저분하다.. ㅡ'

하지만 문제제기 자체를 깎아내릴 수는 없다.

스승 비판, 전공불가침, 근대성 콤플렉스는 학계의 연구자들의 자유로운 연구 주제 설정을 '실제로' 제약한다. 여기에 특별히 덧붙일 것은 편향된 해외 유학 제공이다. 연구자의 해외 유학을 지원하는 학진, 이건희장학재단, sk고등교육재단은 심사 단계에서 한국 사회의 지식 담론을 제한할 정도의 권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목차를 흝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 목차

1. 학계의 금기를 말하며
2. 스승 비판
3. 전공불가침의 법칙
4. 논문 형식의 실험

5. 이성의 세계에서 추방된 주제들 (★)
- 고통 (사회적 고통, 아서 클라인만)
- 죽음 (엘레건트 유니버스, 브라이언 그린)

6. 생존 인물에 대한 탐구
7. 진보 없는 보수, 보수 없는 진보
8. 김우창 혹은 학제성
9. 참을 수 없는 생태의 비생태성
10. 문화비평에 ‘문화’와 ‘비평’이 없다
11. 대중적 글쓰기의 허구성
12. 근대성 콤플렉스

* 연결

학계의 금기를 찾아서, 강성민, 2004, 살림
교수신문 (http://www.kyosu.net/)
- 교수신문 강성민 기자 기사
  (http://www.kyosu.net/news/articleList.html?sc_area=I&sc_word=smkang)

사회적 고통, 아서 클라인만, 안종설 옮김, 2002, 그린비

죽음, 또 하나의 세계, 최준식, 2006, 동아시아
사후생 (on life after death), 엘리자베스 퀴플러-로스, 최준식 옮김, 2002, 대화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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