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저주받은 천재 정신분석학자 빌헬름 라이히는 그의 저작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통해 "대중들은 어째서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기보다는 손쉽게 믿고 맹목적으로 나아가는 대중의 비합리적이고 도착적인 욕망이 파시즘적인 정치 지도자를 불러왔다고 빌헬름 라이히는 지적한다. 프랑스와 한국에서 각각 사르코지와 이명박이라는 인물들이 열광적인 지지를 얻어 대통령이 된 지금의 상황을 이처럼 잘 설명하는 논리가 있을까.

정신적으로 아픈 민중들이 정신착란적인 지도자를 불러왔다는 논리인데, 이를 해결하기 위한 그의 해법은 아주 단순하다. 즐거움에 근거한 노동을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삶과 노동의 적대관계를 해소할 수 있으며, 그런 사람들의 노동은 생물학적 활동욕구를 최대한 발전시켜 자연스럽게 성 욕구를 해방시킴으로써 성격구조가 경직되는 것을 막는다고 말한다.

지극히 상식적인 논리를 펼쳤을 뿐이지만 라이히는 미치광이로 낙인찍혀 학계로부터 추방당하고 미국의 한 감옥에서 죽어갔다. 죽을 때까지 사랑과 노동과 지식이 우리 생활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며.

실로 미쳐 돌아가는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세 가지가 바로 사랑과 노동과 지식인 것을!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고, 성적이 학과를 결정하고, 연봉이 행복을 측정하는 도구인 사회에서 그건 점점 더 불가능해지고 있다. 욕망은 끊임없이 조작되고 개인이 지닌 자발적 의도는 시간이 갈수록 희미해진다.

나의 진정한 욕망을 파악하는 것은 아주 사소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내가 좋아하는 색깔, 옷, 반찬, 영화, 작가, 길, 동네, 나무에 이르기까지.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일일이 묻고 그 목록을 다 모아보면, 자기만의 색깔이 무엇인지 조금씩 드러나게 된다.

나의 색깔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한 우물' 이데올로기의 강박으로부터의 탈출이다. "한우물을 파야한다."는 시대를 초월하는 금과옥조이다. 살면서 이 주장에 대해 감히 시비거는 사람 몇 못봤다. 그러나 한우물 파기 싫으면 어떡해야 하는지, 그 우물에서 아무것도 안 나오면 어떡할 건지에 대해서는 답해주지 않는다. 다행히도 자기가 처음 파기 시작한 우물에서 계속 재미있는 게 나오면 좋겠지만, 안 그럼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은가. 지조없이 연애도 많이 했고, 또 지조없이 여러 우물을 파면서 살아온 나한테는 언제나 이 경구가 마음의 짐이었다.

그걸 어느날 희완이 훌훌 떨치게 해주었다. 문학, 연극, 사진, 문화정책, 흙건축 참 난 너무 여러 우물을 파는 것 같다, 이러면 안되는데... 이렇게 잠시 회의하는 나에게 희완은 말했다. "얼마나 좋아. 하고 싶은 게 많다는 거. 그리고 그걸 다 해볼 용기가 있다는 거. 그럼 너의 인생은 얼마나 풍요롭겠니."

오호, 그렇다. 관점을 전환하면 그렇게 된다. 집단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한 영역씩 맡아서 한우물을 죽어라 파주는 것이 효율적이다. 그러나 각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그건 어쩌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인생일 수도 있다. 난 이 거대한 사회의 나사가 아니다. 나혼자서도 하나의 거대한 우주를 구성할 수 있다. 여러 우물을 파면서, 세상의 모든 재미를 두루 즐기면서.

- 목수정,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치맛속까지 정치적인
-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기> .2008.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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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을 해서 정상적인 아이로 성장할 가능성은 있나요? 어제, 아기가 태어난 병원에서는 수술을 받더라도 식물적 존재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식물적 존재라..."

의사는 버드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버드는 의사를 지켜보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버드는 자신이 부끄러운 열망에 사로잡히는 것을 실로 확실하게 느꼈다. 그것은 버드가 소아과 창구에서 아기가 살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거대하고 검은 멸구벌레 떼처럼, 그의 머리 속의 어둠에 생겨나, 굉장한 기세로 증식하면서 그 자체의 의미를 점차 명확하게 만든 열망이었다.

나와 아내가 그 식물적 존재, 아기 괴물한테 한평생 매달려 살아가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새삼 그것을 의식의 표면에 떠올리며 버드는 생각했다. 나는 어떡하든지 아기 괴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아, 내 아프리카 여행은 어떻게 되는 건가?

버드는 자기 방어적인 열정에 사로잡혀 마치 보육기 속의 아기 괴물로부터 유리 칸막이 너머로 저격당하기라도 하듯이 몸을 도사렸다. 동시에 버드는 회충처럼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는 에고이즘을 부끄럽게 생각해, 온몸에 땀이 배고 얼굴이 빨개졌다. 그의 한쪽 귀는 완전히 마비되어 거기에서는 피가 흐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

"당신은 이 아기가 수술을 받고 회복되기를 바라지 않나요?"

- 오에 겐자부로, 개인적 체험, 고려원


오에 겐자부로는 인간의 내밀한 어두운 감정을 까발리는 데 탁월하다. 그는 그런 장면을 그려내는 데 특별한 재능과 흥미,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같다. 그가 쏟아내는 비열하고 저열한 인간의 내면은, 그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로부터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끔찍하더라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유토피아가 아니므로, 연역적으로든 귀납적으로든 이 세상을 살아 가는 우리는 싸움터에서 싸우다 머리에 상처를 입은 아폴리네르를 동정하는 동시에 쓰레기통으로 처박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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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글을 쓰고 싶다.

글 자체로도 맛깔난데다가,
사회과학적 개념의 풍부하고 정확한 사용 역시 흠 잡을 데가 없다.



얼마 전 악명 높은 디젤의 광고 캠페인이 보여주었듯이 혹은 <애드버스터스>가 배출한 스타 그래픽 디자이너인 조너선 반브룩 Jonathan Barnbrook 의 최근 작업이 보여주듯이, 북한은 후기자본주의 세계가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위해 마치 예약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것은 자유의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후기 자본주의의 소비자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만끽하고 그에 안도하기 위해 게걸스럽게 소비하는 또 하나의 광고 이미지로 떠오른 북한을 가리킨다. 따라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탄하며 위협적인 발언을 쏟아내는 디자이너들과 광고업자들의 눈길 사이에는 아무런 거리가 없다.

- 서동진, "<애드버스터스>라는 희비극 : 반문화적 상상력과 신경제라는 자본주의의 합창"
in 디자인 멜랑꼴리아, 2009, 디자인플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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