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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27 공자.
  2. 2011.04.26 오래 된 정원.
  3. 2011.04.26 고통은.

공자.

BookToniC 2011. 4. 27. 19:29

H.G.Creel 의 [공자] (원제 : Confucius : the Man and the Myth, 1949) 를 재미있게 읽었다. 최근덕 선생의 [한글논어, 1995] 를 일독한 후에도 영 구절들의 의미가 밝게 다가오지 않아 답답해하던 차에 만난 크릴의 책은 가문 날 단비와 같았다.

이 책은 논어에 대한 주석이나 해설서는 아니다. 오히려, 인간 공자는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질문하고, 저자가 초기 공자의 삶과 사상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는 유일한 텍스트로 인정한 '논어'를 통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한다.

'인간' 공자의 모습은 자못 정감있다. 특히 공자 개인의 삶과 공자의 곁을 지켰던 제자들과의 관계가 재치 넘치는 필치로 꽤 많은 장을 할애해 서술되어 있다. 이 장을 읽는 독자들은 누구나, 나이와 신분을 넘어 스승에 대한 예의와 사랑으로 똘똘 뭉친 훈훈한 사내들을 만나고, 곧 그들에게 친근감을 느낄 것이다. 공자도, 제자들도, 마음 속에 그리는 것보다 더 털털하고, 더 소심하고, 그리고 더 순수하다.

크릴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공자 사상의 본질은 개혁적 민주주의에 가깝다고 감히 주장한다. 인간을 믿고, 교육의 힘을 통해 인간의 교정됨을 믿고, 이것이 예에 반영되어 정치의 근간을 이루기를 주장했던 공자의 사상은 당대로서도, 오늘날로서도 혁명적인 민주주의 사상의 원천으로 조명받을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고증학적 지식을 토대로, 논어 외 예기, 주역, 좌씨전 같은 공자의 저서들을 단연코 '후대의 위작'이라고 단정한다. 공자 사후, 맹자와 순자를 거쳐 의례화하고 공식화한 유교가 역사를 거치며 신비주의적 도가와 전제주의적 법가의 사상에 왜곡되고 첨가되어 오늘날 공자의 모습은 초기 유교와는 전혀 다른 권위적이고 계급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초기유교의 모습은 오히려, 고대 중국 역사의 제한적 조건 아래서 최대한으로 추구할 수 있었던 민주주의 사상에 가깝다는 것이 크릴의 주장이다.

이 주장은 편협하다. 그러나 고전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잊혀진 고대의 고전과 현대의 사상을 연결시킨다. 그래서 가슴이 뛴다.

나는 초등학교 때 3년 동안 한문을 배운 적이 있다. 지금은 고층의 아파트가 들어선 배봉육교 어귀, 판자집촌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목에 서당이 있었다. 괴산에서 올라온 귀가 큰 할아버지 선생님이 자필로 쓰고 묶은 허름한 책을 가지고 한문을 가르쳤다. 할아버지 선생님이 선창한 대로, 불경처럼 명심보감을 후창했던 앞니 빠진 검은머리 소년이 기억난다. 나는 3년을 배우고도 삼경은 커녕 명심보감도 들었다 놓기만 했다. 선생은, 내가 한자를 못 외운다고 때리기는 커녕 과일이나 깎게 한 나쁜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은근한, 마치 서당 훈장이셨던 외할아버지가 생존해 계셨다면, 그분께서 외손자에게 꼭 한번은 불러주셨을 특유의 경읽기는, 리듬이 좋았다.

나는 이 책에서 잊었던 그 리듬을 다시 듣는다. 동양의 고전은 현대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건, 내게 지나치고 잊혀진 것만 같던,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세계와 오늘의 나를 이어주는 '느낌'을 준다. 나는 그것이 참 고마웠다.


끝으로 이 세상의 모든 종류의 교조주의자들이 경청할 공자의 한 구절, 크릴이 주목했던 그 구절을 첨부한다. 나는 이 구절이 단박에 좋아져서, 여러번 읽고 외우게 되었다.. 물론 한 번 보고 외울 정도로 짧아서이지만.

"공자는 제자들에게 진리를 말하지도 않았고, 절대적인 가치 척도를 제시하지도 않았으며, 그들 스스로 진리에 도달하도록 교육하였다.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인간이 도를 넓힐 수는 있지만, 도가 스스로 인간을 넓게 할 수는 없다고 하셨다.' (子曰 人能弘道 非道弘人)"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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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된 정원.

BookToniC 2011. 4. 26. 22:43

나는 오래 된 정원을 하나 가지고 있지
삶을 상처라고 가르치는 정원은
밤낮없이 빛으로 낭자했어
더 이상은 아물지도 않았지
시간을 발밑에 묻고 있는 꽃나무와
이마 환하고 그림자 긴 바위돌의 인사를 보며
나는 그곳으로 들어서곤 했지 무성한
빗방울 지나갈 땐 커다란 손바닥이 정원의
어느 곳에서부턴가 자라나와 정원 위에
펼치던 것 나는 내
가슴에 숨어서 보곤 했지 왜 그랬을까
새들이 날아가면 공중엔 길이 났어
새보다 내겐 공중의 길이 더 선명했어
어디에 닿을지
별은 받침대도 없이 뜨곤 했지
내가 저 별을 보기까지
수없이 지나가는 시간을 나는
떡갈나무의 번역으로도 읽고
강아지풀의 번역으로도 읽었지
물방울이 맺힌 걸 보면
물방울 속에서 많은 얼굴들이 보였어
빛들은 물방울을 안고 흩어지곤 했지 그러면
몸이 아프고 아픔은 침묵이 그립고
내 오래 된 정원은 침묵에 싸여
고스란히 다른 세상으로 갔지
그곳이 어디인지는 삶이 상처라고
길을 나서는 모든 아픔과 아픔의 추억과
저 녹슨 풍향계만이 알 뿐이지

- 장석남,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문학과 지성사


요 며칠간 문학에 많은 빚을 졌다. 장석남의 시가 없었더라면, 나의 삶은 적어도 당분간은 절룩거렸을 것이다. 그의 시가 조심스럽게 만들어 준 아담한 정원에서, 나는 울다가 지쳐 잠들고, 다시 일어나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들이 지나가고 바람이 왔다 가고, 미끄러지는 물방울. 그곳에서 비로소 나는 헐거워진 내 마음을 놓아둘 수 있었다. 엄마의 품처럼 너그러웠다. 

그래서 문학의 효용은 확실히 계산하기 어려운 것이다. 언어가 구성한 공간은 이처럼 넉넉하고 아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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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Pooongkyung 2011. 4. 26. 06:13

무언가를 (또는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한다. 이해는, 대상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교정해야 하는 부단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인식을 교정한다는 것은 일상적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에너지 이상의 노력을 요구하는데, 그 노력은 오랜 시간에 걸쳐 안정되어 있는 세계관을 깨뜨리고 새로이 불안한 세계를 구축하는 지난한 과정을 감수하는 것이다. 가능하면 내게 남은 모든 힘을 다해 피하고 싶지만, 그 시간을 감내하고 극복하는 것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고통은, 오직 고통 홀로는 그것을 경험한 인간을 성숙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통 그 자체는 아무런 반성도 성찰도 남기지 않는다. 고통만은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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