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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1.29 베르그송, 시간의 이미지와 기억의 미학 _ original text 3
  2. 2007.01.29 Intro.juna 4
  3. 2007.01.07 태백산맥 6

 03.

심리학의 원조는 경험론의 마지막 주자인 흄이다. 흄이 자기동일성에 대해서 설명한다. 베르그송은 흄을 비판한다. 흄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지각은 안에 원자의 방식으로 들어온다. 다른 채로 들어온다. 분간해서 들어온다. 붉은 , 노란 색이 원자처럼 따로따로 들어온다. 기억은 원자처럼 끊어져 남아 있고, 사유는 감각의 연합 (다발) 이라고 생각한다. 노란 귤이 맛있다, 노란 + + 맛있다는 감각이 연합한 것이다. 관념들 사이에 인력 (뉴톤 물리학 : 신이 말하기를, 뉴턴이 있어라..) 작용하는데, 유사 / 인접 / 인과 라는 세가지 방식에 의해 모인다. 이것이 심리학의 연상주의 이론으로 발전한다. 흄에게 이것은 선험적인 법칙이 아니라 경험적인 법칙이다. 나는 그야말로 백지인데, 감각이 들어와 우연에 따른 관념 연합의 법칙애 의해 수놓아 지는 것이다. 흄은 정신 세계의 뉴턴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우리 내부의 관념도 원자들처럼 인력에 의해 결합되곤 하는 것이다. 거칠게 이런 논조라고 본다. 인간은 지각들의 다발 또는 집합일 뿐이며 인격(personality : 사람을 사람이게끔 하는 원리) 이루는 하나의 통합적 원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성격, 사고를 설명하는 기본 토대는 관념들의 우연한 이합집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경험론도 기억과 자기동일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철학은 상식적인 문제를 설명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흄은 물리학이 모델이다. 데카르트는 수학이 모델이자 이론 물리학이다. 뉴턴은 실제 현실을 설명하는 물리학을 했다. 베르그송은 정신은 물질, 수학 이전에 생명이라고 주장한다. 베르그송이 문제를 제기할 때는, 전제에 대한 강박을 말한다. 베르그송의 시대는 생물학의 시대(19c). 기억은 근본적으로 생물의 문제인 것이다. 의식은 기억이다. 의식상태는 자체로 보존되는데, 보존은 의식상태들이 서로 간에 유기적으로 (organique <-> in-)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가능하다. 생명체로는 원자와 분자만 가지고는 설명이 안되는, 한단계 위에 있는 구조인 것이다. 조직이라는 차원이 있는 것이다. 기억은 스스로를 조직하는 특징이 있다. 기억을 원자로 삼으면 결코 자기동일성을 설명할 없다. 기억이 무기적이라면,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기억은 아무런 관계가 없이 서로를 배재하는, 외재적-외적 관계에 놓이게 된다. 생명체는 자르면 죽는다. 다르다. 유기적 결합은 무기적 결합과는 다르다. 절대 자를 없이 자기 자신으로 하나의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기적 동일성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자체로 내재적인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내재성의 철학은 기본이 생물학이다. 물리학이나 수학에 기초한 철학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분자생물학이 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생물학을 과학으로 인정한 사람들도 있다. 소립자 차원의 물질만 확실한 존재고, 물리적으로 설명이 안되는 상위 단계의 것들은 존재가 아닌 환상이라는 입장이다. 그렇게 되면 생물학은 자리를 잡기 어렵다. 물리학자들은 DNA 나선구조를 발견한 이후에 생물학을 과학으로 받아들였다. 전향한 물리학자들이 생물학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끌기도 했다. 분자생물학의 기본 전제는 생물은 기계다,. 특히 미국은 완벽한 환원주의적 입장이 주류다. 그렇게 되면 개별 생명체를 실제로 보기엔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것이 베르그송이 말한 과학자들의 믿음과 같은 것이다.

 

국재화 이론, 뇌의 어떤 부분의 분자 활동에 의해 정신 상태가 만들어지고 어떤 부분에 저장이 되어 있고.. 완벽한 유물론적 입장이다. 그것은 공간 아래 분자만 나열되어 있는, 공간적 차원의 과학의 입장에서 조금도 발전하지 못한 것이다. 시간은 여전히 결여되어 있으며, 이것은 생성이 아닌 것이다. 생물학과 심리학을 공부하긴 했지만, 베르그송의 비판은 국재화 이론 신봉자들에 의해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10 , 피에르 마리라는 과학자가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간다. 프로이트의 선생인 샤르꼬가 운영하는 병원에 들어가 몇십가지의 실어증 자료를 검토해 베르그송의 이론을 확인한다. 국재화 이론의 뇌지도 역시 검토를 했는데, 어떤 경우에는 맞고 어떤 경우에는 틀리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를테면 베르카의 사례는 50가지 중에 10가지만 맞게 나온 것이다. 이후 국재화 가설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부분은 언제나 전체로서 기능한다. 어떤 부분이 반드시 일을 한다고 얘기할 없다. 뇌를 통해서 정신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은 동의하지만, 환원주의적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뉴런들이 네트워크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특정한 자극에 동일한 반응이 나타나지는 않는 것이다. 유물론자들은 뉴런들의 네트워크의 활성화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네트워크 이론은 받아들여지지만, 순간순간마다 다른 방식으로 활성화된다는 가설이 그렇게 과학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철학자가 과학의 영역에 도전해서 과학자들의 도그마를 깨뜨려버린 거의 유일무이한 사례가 베르그송이다. 물론 유물론자들은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베르그송의 주장은, 정신은 역동적이고 시간은 다이나믹한 힘이라는 것이다. 생명처럼 스스로를 자기조직화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self-organization 언급하진 않았지만, 같은 이야기다. 물질도 넓게 보면 자기조직화하는 존재인 것이다.

 

3. 물질과 기억

물질의 지속은 의식 속에서 기억으로 보존된다. 우리 의식 내부를 관찰해 보자. 원자와 같은 관념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우연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요소들이 상호연관 / 상호침투하면서 흐르는 것을 있다. 의식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흐름이다. 윌리암 제임스는 심리학자로서 의식이 흐름이라고 했다. 흐름을 조금 쉽게 이해하려면, 유체의 비유를 생각하면 된다. 원자는 고체다. 딱딱하다. 뚫고 들어갈 없다. 고체와 고체가 만나면 튕기거나 결합한다. 유체는 서로가 서로 안으로 들어간다. 물에다 잉크를 떨어뜨리면 섞인다. 베르그송의 흐름이 그와 같다. 우리의 의식은, 마음이 누군가를 증오하고 있는데 사실은 사랑하고 있는 것이더라.. 서로서로 침투해 들어가는 그런 상태라는 것이다. 내가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고 하면, 흄은 병렬 현상으로 설명하겠지만, 베르그송은 생각 안에 이미 다른 생각을 잉태하고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이전의 생각을 압도하게 되는 것이다. 의식은 순간으로 자를 없이, 연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두번째 저서는 기억이 흐름으로서 남김없이 보존된다고 말한다. 우리의 기억은 눈덩이처럼 모든 것을 보존한다. 눈덩이에 눈이 붙는 모양이 물건을 조립할 때와는 전혀 다른 과정인 것이다. 주변의 것을 족족 흡수하는, 모든것을 고유한 질로 보존하는, 이것이 우리 기억의 형이상학적인 배경이다. 앞의 저서와 같이 봤을 이렇다.

 

의식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기억도 사실은 무의식 (vision panoramique) 속에 보존되어 있다. 베르그송은 프로이트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언급하고 있다. 의미는 조금 다르다. 그의 이론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살았던, 체험했던 모든 것이 쌓여있는데 모든 것을 우리가 떠올리지 않는다. 지금 내가 확실히 인식하는 것은 의식이 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무의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살았던 모든 것을 떠올린다면 우리는 없다. 떠올린다는 의미는 다시 산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뭐가 떠오르는가. 나의 주의를 끄는 , 삶에 필요한 , 생존에 필요한 것이 주의를 끄는 것이다. 데카르트에게 진리의 장소가 베르그송에게는 생존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을 오로지 의식으로만 묘사하고 규정한 것이 데카르트다. 그래서 무의식이 땅이 없는 것이다. 베르그송적 무의식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죽기 전에 굉장히 짧은 시간에 과거의 대부분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한다. 순간적으로 거의 시간을 초월한, 파노라마적 환영 (vision panoramique) 이다. 과거의 기억은 무의식 속에 저장되어 있는 것이다. 당시엔 무의식 얘기가 나오기 시작할 때였고 최면술도 사례의 일종으로 들어간다. 최면은 현재에서 주의를 완전히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를 마치 현재처럼 생생하게 떠올리는 일이다. 그것이 지속에 기초를 자신의 기억이론을 증명하는데 기여하는 사례가 된다. 무의식이 오히려 기억에 가깝다. 현재의 주의를 끌지 못할 뿐이다. 문제는 어떻게 과거 기억의 상기가 가능한가, 망각이 어떻게 가능한가의 매커니즘 밝히는 것이다.  

 

3.1) 원뿔도식 (프린트 참고)

생존과 기억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어떤 경우에는 생존과 관계없이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을 몽상가, 현재에만 매여 사는 사람을 충동가라고 한다. 보통 인간들은 끝없는 흐름 속에 있다. 흐름은 평면, 내부에서의 흐름이 있고, 수직적인 역동적인 흐름이 있다. 우리는 이중의 어디에도 결코 고정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통과한다는 사실 자체이다. 통과한다는 사실 자체는 우리의 의식이 끝없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부분에 머물러서 어떤 관념을 끄집어내는 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요구에 응하는 , 주의할 우리는 기억을 떠올린다. 위로 올라갈수록 모호하긴 한다..

 

과거와 현재로 나눠보면, 과거와 현재는 공존한다. 테제는 입체파, 큐비즘 화가들에게 영감으로 작용한다. 화면, 순간 안에 과거와 현재, 이면과 겉면을 동시에 표현한다. 원래 화면은 데카르트 식으로 공간일 수밖에 없는데.. 화가는 공간예술로 시간이 상실된 상황인데, 큐비즘은 시간을 공간 안에 살려낸다. 과거와 현재가 언제나 총체성으로 작용한다는 영감을 강력하게 살려냈다. 베르그송은 20c 전반 프랑스 예술가, 문학가들에게 전무후무한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과학자 사회에서는 많이 외면받았다. 1950년대 라깡과 초현실주의자들의 관계가 알려져 있는데, 이미 베르그송의 세계가 초현실의 세계였기 때문에 그리 낯선건 아니다. 물론 구조주의자들은 흐름과 대립되기 때문에 베르그송을 비판한다. 들뢰즈는 구조와 생성이 모순되지 않는다면서- 생성 위에 구조가 있다면서 가지를 조합시킨다. 

 

* 연결

md / 01 / 02 /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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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juna

Intro. juna 2007. 1. 29. 08:47

새 웹둥지를 틀었습니다.

사회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고민과 작업을 밀고 나갈 공간입니다.
작년 말부터 시작한 대안기업 프로젝트 관련한 글도 꾸준히 올릴 생각입니다.
혼자 안에 갖히지 않은, 네가 나인 사람들과 이야기할 공간도 마련했습니다.


어떻게든 틈을 만들고 싶습니다.

나의 앎과 삶이.
아픔만으로, 슬픔만으로 그치지 않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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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6

BookToniC 2007. 1. 7. 02:40

열 명이 뒤돌려 한 줄로 세워졌다. 그들의 윗몸을 여러 개의 전짓 불빛들이 일제히 비추었다. "발사!" 총소리가 서로 뒤엉키며 어둠을 깨고 찢었고, 손들을 뒤로 묶인 사람들은 순식간에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줄!"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드러났다. "발사!" 열 명의 윗몸이 불빛 밖으로 사라졌다. "완료했습니다." "수고들 했소.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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