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몸이 가장 먼저 그리워하고,
가장 늦게 잊혀짐을 받아들이지.
대지가 계절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뜻하지 않게 일찍 귀경한 오늘이었다.
저녁일과가 30분 당겨진데다,
이상사 아저씨의 호의로 부대에서 20분도 지나지 않아 청주터미널에 도착했기 때문이야.
금요일 저녁 일곱시 고속터미널,
1년만에 맛보는 그 낯선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청주에서 서울로 거침없이 내달리는 버스 안에서 줄곧 생각했다.
그래, 그리고서 나는,
무심코,
내게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지난 사람의 흔적을 찾아 서성였던 것이다.
출판사 디비구축을 위해 컴퓨터칸에 갔다가도,
숙소 책상 앞에 붙여놓을 세계지도를 구하기 위해 디자인칸에 갔다가도,
어김없이 나는 한 자리에 돌아와 있었는데.
늘 그 사람이 나를 기다리던 여행서칸, 신간문학도서칸,
그 어귀에서 나는 귀향하는 철새처럼, 자꾸.
처음에는 몰랐어.
처음에는 내가 찾는 어떤 책이 그 곳에 있는 줄 알았지.
이년도 더 지난 뒤에 떠날 유라시아 여행을 준비할 책이 그 곳에 있는 줄 알았지.
그런데 나는 그 주변에서 그저 서성이기만 한단 말이야.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단 말이야. 책이 아니라 작고, 따듯한 것을 찾고 있었단 말이야.
한시간이 넘게, 서점 구석구석을 여행한 뒤에야,
아.
그랬던 거구나.
다른 이유가 없었던 거구나.
몸이 잊지 않았던 거구나.
몸이란 게 참 낯선 것이었구나.
그리고 한참을 그 곳에 서서 가만히,
온몸으로 눈처럼 내리는 아픔을 지켜보았네.
얼마나 아름다웠고,
또 얼마나 지루하고,
또 쓰리고,
그리고 다정했던가.
그 사람을 기다리던 그 때 그 시간처럼,
나는 이제 다시 없는 그 사람을 잠시 더 기다리며,
서점 가득 내리는 아픔을 지난 사랑을 받아내었네.
결코 길지 않은 이 이야기의 끝은 터미널 지하상가의 굴국밥집에서.
언젠가 한번 그 사람이 같이 가자고 했던,
그러나 결국 단 한번도 같이 가지 않았던,
그래서 언제나 반대편 자리를 비워놓고 혼자 육천원짜리 한그릇을 비워내던,
굴국밥집에서.
이제 나는 아픔을 받아내고
꼭꼭 씹고, 침과 섞고, 쌉쌀한 갓김치를 얹어 목구멍으로 넘길 줄 아는,
그런 나이가 되었으니.
그리워한 것도 지친 것도 등을 돌려버린 것도
손을 놓은 것도
모두가 나의 몸이었으니.
육천원에 장장 두시간 반의 영문 모를 대장정을 팔아치우고
무진같은 고속터미널을 떠났다.
부글거리는 아랫배를 붙잡고 그윽그윽 거리며.
대지가 계절을 받아내듯이,
아끼며 아픔을 받아내는 그 날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