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우리는 '구조화된' 사회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구조화'는 바로 확률의 조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구조화는 어떤 선택들의 확률은 훨씬 높이고 어떤 선택들의 확률은 훨씬 낮추는 식으로 보상과 처벌의 배치를 조정, 재조정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결국 '현실'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내적 소망을 방해하는 외적 저항에 붙이는 이름이다.. 장애물들의 저항이 강할수록, 장애물들은 그만큼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자본주의적이고 개인주의화된 소비자 사회의 주민인 우리가 인생이라는 게임의 전부 혹은 대부분에서 계속해서 던질 수밖에 없는 주사위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불평등에서 이익을 얻거나 혹은 이익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정해져 있다. 

- 지그문트 바우만,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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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매혹 당한 사람은 상대가 자신을 사랑할 리 없다고 지레 짐작하기 쉽다. 거절이 두려운 나머지 깊게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단속한다. 이런 감정은 열등감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열등감은 우울의 씨앗이다. 열등감에 시달리며 우울에 빠진 이는 자연스레 그 원인을 제공한 상대를 증오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매혹을 증오와 분노 따위 뒤틀린 형태로 표현한다. 

- 박수현, 서가의 연인들, 자음과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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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브륀, 내 이름을 기억하는가?"

 "그럼요. 영주님의 이름을 기억하고말고요. 영주님이 알고 계신 여자분들은 자기 은인의 이름을 잊어버리나 보군요."

 "내 이름이 뭐지?" 영주가 물었다.

 "내 혀가 그 이름을 가져올 동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내 입이 그 이름을 발음할 동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어서 이름을 말하라." 영주가 큰 소리로 채근했다.

 콜브륀이 미소를 지으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아이드비크 드 엘이 당신의 이름이지요."

 그러자 영주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천지가 캄캄해졌다. 모든 게 꺼졌다. 지금 내가 말을 함으로써 꺼버린 이 촛불처럼.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끈다.

 어둠 속을 내닫는 말발굽 소리만 들렸다.

 

- 파스칼 키냐르/송의경 옮김,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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