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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0.27 내 동생. 6
  2. 2008.10.10 문제는 꿈이 아니다.
  3. 2008.10.07 자신감과 자만심 사이. 4

내 동생.

Pooongkyung 2008. 10. 27. 07:41

누군가를 생각하면 언제라도 정신이 아찔해지곤 한다.

내 경우는 동생이 그렇다.

고려대학교 수시에서 떨어진 동생을 막 확인하고,
(그것도 내가 지원하라던 자유 전공을)
형의 그림자 안에서 괴로워할 동생을 생각하자 막막해졌다.

양서고에 둔 것이 잘못이었다.
왜 그 때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까.
1학년이 되고 얼마 안 되어, 한일고로 전학갈 기회가 있었다. 그 때,
라이벌 학교가 함부로 자신의 학생을 데려간다며 화를 내던 양서고 교장에게,
왜 한 마디도 따지지 못했을까.

라이벌은 지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학교였으면서,
제 자존심 때문에 제 학생의 길을 막은 그에게 왜 따지지 못했을까.
그래도 정 가겠다면 정신 이상으로 퇴학시키겠다는 그 어처구니 없음에 왜 항변하지 못했을까.

그 곳에서 평범하게 지내다 평범하게 졸업해 평범하게 재수를 하고 있는 동생은.
입시교육의 정점에 오른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의 망령에서 허우적대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동생을 둘러싼 가족의 것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명백히 동생의 것이 되기도 한 것이다. 입학 외엔 답이 없는 괴로움인 것이다.

이 사회를 증오한다.
사람이 편안히 머무를 장소를 제한한 이 사회를 증오해 마지 않는다.

어서 이 굴레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답이 없더라도 답을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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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문제는 꿈이 아니다.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 란 질문은 수정되어야 한다.

위와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떤 답이 되돌아오는가?
또는 어떤 답을 할 수 있는가.

오늘날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는,
그 전제에 '꿈=직업' 이란 등식을 숨기고 있다.
누가 우리의 꿈을 직업 따위에 한정시켜 버렸나.
따져보면, 직업에는 얼마나 많은 전제들이 함축되어 있나.
높은 소득, 그로 인한 소비, 보험, 타인의 인정..

꿈은 좁아졌고 오염되었다.
직업을 의미하는 꿈은 당장 폐기함이 옳다.
오염된 꿈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직업으로 나타낼 수 없는 삶의 비의들을 놓치게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꿈을 묻는 질문은 어쨌건간에 '답' 이 있는 질문이란 것도 문제다.
답은 일정한 '정형'을 따르기 마련이다.
스타크래프트 게임의 테크트리처럼,
일정한 경로를 따라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것이 개인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것도 문제지만,
동시에 얼마나 시대에 역행하는 것인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이같은 정형화된 답의 끝은 무책임이다.


따라서 위의 질문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

'당신의 질문은 무엇인가'로.
 
질문을 가진 이는 결코 좌절을 모른다.
질문을 가진 이는 결코 그의 상상력을 제한받지 않는다.
질문을 가진 이는 삶을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

질문을 갖고 걸어가는 이 길 자체가,
늘 새롭고 끝이 없는,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 이진경 특강을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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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과 자만심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유광수 선생님이 가로되,
"자만심은 예전에 '했던 것'에 대한 것이고,
자신감은 지금 '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나는 넥스터스를 '했'었다.
사회적기업이라는, 2006년 당시 정신적인 볼모지에 겁없이 발을 내딛었다.
혼자였다면 돌아갔을 길을 상엽, 종익, 동언이와 같은 멋진 친구들로 인해,
좌고우면하지 않고 즐거이 걸을 수 있었다. 
인도의 사회적기업을 해부하겠다는 꿈을 꿨고, 그것을 기획서로 옮겼고, 
평소에는 만지지도 못할 돈을 펀딩 받아 인도로 떠날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록 출판은 미뤄졌지만, (언제까지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인도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책도 썼다.

덕분에 이 바닥에서는 뭐라도 이룬 사람으로 여겨졌고,
나도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2007년 이 맘때쯤, 나의 자신감의 원천은 명백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2008년 10월의 나는, 넥스터스를 '하'는 내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넥스터스를 '했'던 나다.

그래서 그것이 영 불편하다.
낡은 훈장처럼 고집스레 달려 있는 그것이 불편하다.
나를 이것저것 했던 사람으로 소개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지난 몇 개월 동안 경험해보고서야 알겠다.
아니, 짐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짐작보다 더 부끄럽다. 보통 낯짝이 아니고서야,
허명을 달고 있는 것은 여간 무거운 일이 아니다.

과거는 오늘 나의 행적으로 인해서 빛나는 것이지,
과거가 오늘의 나를 비춰주지는 않는다. 시간이 지난 영광에 의지하는 자를 우리는,
노인이라고 부른다. 청년과 노인의 경계는 결코 나이가 아님을,
88만원 세대로 스스로를 자조하는 대학 취업준비생과,
세상에 바꿔야 할 것이 많아 즐겁다는 박원순 변호사를 비교하면 금방 알 수 있다.

그에 비추면, 나는 슬금슬금 노인의 길을 굴러가려고 하는 것이다.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 과거에 박제되려 하다니.
(물론 이상한 일은 아닐 수 있다. 과거에 영원히 박제되길 바라는 이도 있으니까.)


했던 사람이 아닌, 언제까지나 나는 하는 사람이고 싶다.
하고 있는 그것이 무엇이 되든지 그렇다. 누구와 함께든지 그렇다.

무언가를 위해 열심히 뛰는 모든 활동가들이 존경스러워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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