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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0.23 작가.
  2. 2008.10.21 환상소설첩.
  3. 2008.10.10 채식주의자.

작가.

BookToniC 2008. 10. 23. 11:45


 그는 결코 추억이 가져다 주는 기쁨 속에 살아본 적이 없었다. 느낌들은 순간적으로, 그리고 생생하게 그를 스쳐 지나가버렸다. 한 도공이 주홍 안료를 사용하여 만든 도자기, 신들이기도 한 별들의 둥근 지붕, 달, 문지르는 예민한 손끝에 와 닿는 대리석의 매끄러움, 그가 입으로 덥썩 물어뜯기를 좋아했던 멧돼지 고기의 맛, 한 페니키아의 단어, 노란 모래 위에 꽂아 세워놓은 창이 드리우는 검은 그림자, 바다 또는 여인들이 가까이 다가와 있는 감촉, 꿀로 쓴맛을 완화시켜 놓은 칙칙한 포도주, 그것들만으로도 그의 정신은 가득 메워져 버릴 수가 있었다. 그는 두려움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한 차례 적의 성벽에 걸쳐놓은 사다리에 가장 먼저 올라간 적도 있었다. 열정적이고, 호기심이 많고, 충동적인 그는 즐겼다가 금세 잊어버리게 되는 그런 것들 외에는 한눈을 팔지 않은 채 여러 땅을 돌아다녔고, 바다 이편과 저편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궁전들을 돌아보았다. 그는 사람들이 북적대는 시장터,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꼭대기에는 반인반수의 형상을 하고 있는 숲의 신들이 살고 있을 어느 산의 산록에서 복잡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는 그것들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밝혀보려고 하지 않은 채 그냥 그것들을 사실로서 받아들였다. 

 점차로 아름다운 세계가 그로부터 떠나기 시작했다. 걷히지 않는 안개가 그의 손금들을 지워버렸다. 밤은 자신의 수많은 별들을 잃어버렸다. 대지는 그의 발 아래에서 불분명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들이 멀어지고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자신이 점차로 장님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소리쳐 울었다. 스토아학파적 금욕주의는 아직 발명되어 있지 않았고, 헥터는 아직 불명예를 입으면서 아킬레스로부터 도망치는 순간에 다다라 있지 않았다. 그는 느꼈다. <나는 더 이상 신화적인 공포로 가득 차 있는 하늘과, 세월이 바꿔놓게 될 내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그의 육체가 앓고 있는 절망 위로 수많은 밤과 낮이 지나갔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그는 깨어났고, (이제 담담하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윤곽이 희미한 사물을 보았다. 그는 마치 어떤 음악이나 목소리를 기억하듯 무의식적으로 이미 자신에게 그 모든 것이 일어났고, 자신은 공포 속에서, 그렇지만 동시에 기쁨과 기대와 호기심 속에서 그것과 맞닥뜨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옛 기억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에게 그것은 마치 바닥이 없는 무엇처럼 느껴졌다. 그는 이제 비에 젖은 동전처럼 반짝거리던 옛 기억을 향한 어지러운 하강으로부터 빠져 나오려고 했다. 왜냐하면 아마 꿈속에서 그랬던 것을 제외하고 전에 단 한번도 그것을 기억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억은 다음과 같았다. 한 남자애가 그를 모욕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찾아가 일어난 일에 대해 아뢰었다. 그의 아버지는 마치 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처럼 그가 떠들어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런 다음 그의 아버지가 벽에서 아름답기 그지없고 단단해 보이는 구리 단검을 끄집어내렸다. 그것은 그가 은밀히 갖기를 탐했던 것이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손 안에 그것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그 단검을 소유하게 되자 그는 자신이 받은 모욕에 대해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말하고 잊었다. 

 [네가 남자라는 것을 보여주도록 해라.]

 그 음성 속에는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 담겨 있었다. 밤이 길들을 깜깜하게 뒤덮고 있었다. 그는 어떤 마술적 힘을 느끼도록 만들어주는 단검을 꼭 쥔 채 집을 둘러싸고 있는 가파른 언덕을 내려갔다. 그는 자신이 아이아스, 또는 페르세우스나 된 듯 꿈을 꾸고, 어두운 짠 공기를 부상과 전투의 상상적 장면들로 가득 채우면서 해안을 향해 달려갔다. 바로 그때 그 순간의 그 느낌이 그가 지금 찾고 있는 것이었다. 나머지는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결투로 치닫게 된 모욕, 어설픈 결투, 피 묻은 칼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등등.

 또 다른 기억이 있었다. 그 안에도 밤과 모험의 징후가 담겨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앞의 기억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었다. 신들이 그에게 부여한 첫번째 여자인 한 여인이 지하실의 어둠 속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마치 돌로 만든 그물 같은 복도들과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비탈을 헤매면서 그녀를 찾아다녔다. 왜 이런 기억들이 그에게 다가왔고, 왜 마치 곧 일어날 일에 대한 예시처럼 아주 담담하게 다가왔던 걸까? 

 그는 광막한 경악 속에서 깨달음에 이르렀다. 지금 가가 내려가고 있는 언젠가는 사라질 눈의 밤 속에서 사랑과 위험 또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레스와 아프로디테.

 왜냐하면 그는 이미 영광과 육보격 시들의 속삼임들, 신들이 구원하지 않을 신전을 지키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섬을 찾아 바다를 방황하는 검은 선박들, 노래하고, 또 그 노래가 인간의 기억 속에서 공허하게 되울리게 될 운명을 가지고 있는 ‘오디세이’들과 ‘일리아드’들의 속삭임을 헤아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미 그것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들에 대해 안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 어둠 속으로 내려갔을 때 느꼈던 것은 그것들이 아니었다. 

 - 보르헤스, [작가] 전문, 보르헤스 전집 4, 민음사

 

AND

환상소설첩.

BookToniC 2008. 10. 21. 14:15

 



환상소설첩
- 6점
윤대녕 외 지음, 방민호 엮음/향연

화단은 상기 모네의 붓질처럼 시시각각으로 색깔이 변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에는 옆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화답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어, 저기 내 귀가 지나가네."

그 말에 언뜻 놀라 화단을 쏘아보니 발마 한자락이 슬쩍 화단머리를 핥고 지나가고 있었다.

"나원 참, 꽃들이 귀가 멍멍해."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이 기묘한 화답은 조금 더 계속됐다.

"신발 신고 가우?"
"맨발에 짚신을 머리에 옂는걸."
"고봐요. 큰애 낳고 안 사준 신발이니 여태 맨발이지. 요새 누가 짚신 신어요, 그냥 들고 다니다 팔 떨어져서 머리에 옂지."
"그럼 당신도 방금 저기 지나갔나?"
"내가 먼저 갔더이다."
"하면 어디 좋은 데로 갔나?"
"조금 더 여기 등 뒤에 누워 있다우."

- 윤대녕, "빛의 걸음걸이",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 생각의 나무


죽을 날을 앞둔 어미와, 그것을 현실을 비껴서나마 인정하려 하는 아비의 대화다. 아. 윤대녕이 이렇게 탐미적인 작가였던가. 빛의 걸음걸이에서 윤대녕은 죽어 있는 이의 현실과 살아 있는 이의 환상을 넘나든다. 떠나는 이들과 다가오는 이들을 한 데 어울리게 하는 글빨을 타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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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BookToniC 2008. 10. 10. 19:40

채식주의자 - 6점
한강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어느날 갑자기 인간에 내재한 식물적 본능이 되살아난다면?

그런데 이런 본능으로의 회귀, 탐색이 육식주의자들에겐 병으로 보일 지도 모른다.
육식을 거부하는 주인공 영혜에 대한 가족들의 광적인 고기 먹이기, 정신병원수감이 그렇다.
영혜는 자신에 대한 세상의 철저한 몰이해 안에서 죽어간다.
자신은 그저, 고기를 안 먹고 식물의 방식으로 살고 싶을 뿐인데.

더하여 인간의 몸이 얼마나 식물적일 수 있는지를 그려내는 묘사도 탁월하다.
특히 식물로서의 영혜의 몸을 캔버스 삼아, 물감으로 꽃잎을 그려넣는 장면은 압권이다. 섬뜩할 정도로 관능적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소설 초반에 주인공이 갑자기 채식을 선언하고, 가족들이 강제로 고기를 먹이려고 한다거나, 고기를 안 먹어서 폭력을 행사하고, 그러자 갑자기 주인공이 동맥을 자르는 - 발단 부분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주인공의 예민함 뿐 아니라, 가족들의 비상식성까지 동반되어야 하는 상황인데, 아무리 소설 속이라고 해도 지나친 설정이다. 이후의 이야기들은 막힘 없이 잘 풀려갔지만, 초반 발단을 받아들이는 게 내겐 너무 어렵더라. 

ps. 주인공 영혜의 독백은 흡사 실제 저자 한강을 보는 듯하다. 영혜의 독백을 읽으며 수업 시간에 그녀가 읽어 준 [나는 희망에 관해 말하려고 한다] 의 음색부터 목소리 톤까지 남김없이 떠올라 어쩐지 소름이 돋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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