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BookToniC 2008. 10. 23. 11:45


 그는 결코 추억이 가져다 주는 기쁨 속에 살아본 적이 없었다. 느낌들은 순간적으로, 그리고 생생하게 그를 스쳐 지나가버렸다. 한 도공이 주홍 안료를 사용하여 만든 도자기, 신들이기도 한 별들의 둥근 지붕, 달, 문지르는 예민한 손끝에 와 닿는 대리석의 매끄러움, 그가 입으로 덥썩 물어뜯기를 좋아했던 멧돼지 고기의 맛, 한 페니키아의 단어, 노란 모래 위에 꽂아 세워놓은 창이 드리우는 검은 그림자, 바다 또는 여인들이 가까이 다가와 있는 감촉, 꿀로 쓴맛을 완화시켜 놓은 칙칙한 포도주, 그것들만으로도 그의 정신은 가득 메워져 버릴 수가 있었다. 그는 두려움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한 차례 적의 성벽에 걸쳐놓은 사다리에 가장 먼저 올라간 적도 있었다. 열정적이고, 호기심이 많고, 충동적인 그는 즐겼다가 금세 잊어버리게 되는 그런 것들 외에는 한눈을 팔지 않은 채 여러 땅을 돌아다녔고, 바다 이편과 저편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궁전들을 돌아보았다. 그는 사람들이 북적대는 시장터,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꼭대기에는 반인반수의 형상을 하고 있는 숲의 신들이 살고 있을 어느 산의 산록에서 복잡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는 그것들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밝혀보려고 하지 않은 채 그냥 그것들을 사실로서 받아들였다. 

 점차로 아름다운 세계가 그로부터 떠나기 시작했다. 걷히지 않는 안개가 그의 손금들을 지워버렸다. 밤은 자신의 수많은 별들을 잃어버렸다. 대지는 그의 발 아래에서 불분명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들이 멀어지고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자신이 점차로 장님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소리쳐 울었다. 스토아학파적 금욕주의는 아직 발명되어 있지 않았고, 헥터는 아직 불명예를 입으면서 아킬레스로부터 도망치는 순간에 다다라 있지 않았다. 그는 느꼈다. <나는 더 이상 신화적인 공포로 가득 차 있는 하늘과, 세월이 바꿔놓게 될 내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그의 육체가 앓고 있는 절망 위로 수많은 밤과 낮이 지나갔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그는 깨어났고, (이제 담담하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윤곽이 희미한 사물을 보았다. 그는 마치 어떤 음악이나 목소리를 기억하듯 무의식적으로 이미 자신에게 그 모든 것이 일어났고, 자신은 공포 속에서, 그렇지만 동시에 기쁨과 기대와 호기심 속에서 그것과 맞닥뜨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옛 기억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에게 그것은 마치 바닥이 없는 무엇처럼 느껴졌다. 그는 이제 비에 젖은 동전처럼 반짝거리던 옛 기억을 향한 어지러운 하강으로부터 빠져 나오려고 했다. 왜냐하면 아마 꿈속에서 그랬던 것을 제외하고 전에 단 한번도 그것을 기억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억은 다음과 같았다. 한 남자애가 그를 모욕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찾아가 일어난 일에 대해 아뢰었다. 그의 아버지는 마치 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처럼 그가 떠들어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런 다음 그의 아버지가 벽에서 아름답기 그지없고 단단해 보이는 구리 단검을 끄집어내렸다. 그것은 그가 은밀히 갖기를 탐했던 것이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손 안에 그것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그 단검을 소유하게 되자 그는 자신이 받은 모욕에 대해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말하고 잊었다. 

 [네가 남자라는 것을 보여주도록 해라.]

 그 음성 속에는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 담겨 있었다. 밤이 길들을 깜깜하게 뒤덮고 있었다. 그는 어떤 마술적 힘을 느끼도록 만들어주는 단검을 꼭 쥔 채 집을 둘러싸고 있는 가파른 언덕을 내려갔다. 그는 자신이 아이아스, 또는 페르세우스나 된 듯 꿈을 꾸고, 어두운 짠 공기를 부상과 전투의 상상적 장면들로 가득 채우면서 해안을 향해 달려갔다. 바로 그때 그 순간의 그 느낌이 그가 지금 찾고 있는 것이었다. 나머지는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결투로 치닫게 된 모욕, 어설픈 결투, 피 묻은 칼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등등.

 또 다른 기억이 있었다. 그 안에도 밤과 모험의 징후가 담겨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앞의 기억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었다. 신들이 그에게 부여한 첫번째 여자인 한 여인이 지하실의 어둠 속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마치 돌로 만든 그물 같은 복도들과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비탈을 헤매면서 그녀를 찾아다녔다. 왜 이런 기억들이 그에게 다가왔고, 왜 마치 곧 일어날 일에 대한 예시처럼 아주 담담하게 다가왔던 걸까? 

 그는 광막한 경악 속에서 깨달음에 이르렀다. 지금 가가 내려가고 있는 언젠가는 사라질 눈의 밤 속에서 사랑과 위험 또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레스와 아프로디테.

 왜냐하면 그는 이미 영광과 육보격 시들의 속삼임들, 신들이 구원하지 않을 신전을 지키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섬을 찾아 바다를 방황하는 검은 선박들, 노래하고, 또 그 노래가 인간의 기억 속에서 공허하게 되울리게 될 운명을 가지고 있는 ‘오디세이’들과 ‘일리아드’들의 속삭임을 헤아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미 그것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들에 대해 안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 어둠 속으로 내려갔을 때 느꼈던 것은 그것들이 아니었다. 

 - 보르헤스, [작가] 전문, 보르헤스 전집 4,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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