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철학테제, Walter Benjamin,
앙겔루스 노부스


1
사람들 말에 의하며 어떤 장기 자동기계가 있었다고들 하는데,

기계는 어떤 사람이 장기를 두면 그때마다 그 반대 수를 둠으로써

언제나 이기게끔 만들어졌었다. 터어키의상을 하고 입에는 水煙

을 문 인형이 넓은 책상 위에 놓여진 장기판 앞에 앉아 있었다.

거울로 장치를 함으로써 이 책상은 사방에서 훤히 들여다볼 수 있

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장기의 명수

인 등이 굽은 난쟁이가 그 책상 안에 앉아서는 줄을 당겨 인형의

손놀림을 조종하였다. 우리는 철학에서도 이러한 장치에 대응되는

것을 상상할 수가 있다. 항상 승리하게끔 되어 있는 것은 소위 <

역사적 유물론>이라고 불리어지는 인형이다. 이 역사적 유물론은,

만약 그것이 오늘날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그 모습을 밖으로 드러내어서는 안되는 신학을 자기의

것으로 이용한다면, 누구하고도 한판 승부를 벌일 수가 있을 것이

.

 

2

로체에 의하면 인간이 지닌 심성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

는 개별적 사물들에 대한 숱한 이기심과 함께 모든 현재가 일반적

으로 미래에 대해 부러움과 선망을 가지고 있지 않는 데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성찰을 좀더 진전시키면, 우리들이 품고 있는 행복의

이미지라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현재적 삶의 진행과정을 한때 규

정하였던 과거의 시간에 의해 채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들에게서 선망의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행복은, 오로지 우리

들이 숨쉬었던 공기 속, 그러니까 우리가 한때 말을 나눌 수도 있

었던 사람들과 우리들 품에 안길 수도 있었던 여인들과의 관계 속

에서 존재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행복의 이미지 속에는 구원의

이미지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함께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사가 주로 관심을 가지는 과거의 이미지도 이와 동일한 양상을 하

고 있다. 과거는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어떤 은밀한 목록을 함께

간직하고 있다. 우리들 스스로에도 이미 지나가 버린 것과 관계되

는 한줄기의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 귀

에 들려오는 목소리 속에서는 이제 침묵해 버리고 만 목소리의 한

가락 반향이 울려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이 연연하는 여

인들은, 그녀들이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누이들의 모습을 하고 있

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과거의 인간과 현재의 우리들 사

이에는 은밀한 묵계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고 또 우리는 이 지구

상에서 구원이 기대되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앞서 간 모든

세대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도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주어져 있

, 과거 역시 이 힘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로

이러한 요구는 값싸게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적 유물론자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3

사건의 크고 작음을 구별함이 없이 모든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얘기하는 연대기 기술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 즉 이 지상에 어젠

가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도 빠짐없이 역사에서 주목되어야 한다

는 진실에 공정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과거가 완벽하게 기록될

수 있는 것은 인류가 구원되고 난 연후이다. 다시 말해 구원된 인

류만이 그들의 과거의 하나 하나를 남김없이 인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시 되살아나는 과거의 한순간 한순간은 그날, 즉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의 일정표의 인용문이 될 것이다.

 

4

우선 의식주를 얻도록 노력하라. 그러면 신의 왕국은 스스로 열릴

것이다. - 헤겔

 

마르크스에 의해 훈련을 받은 역사가가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계

급투쟁은 조야하고 물질적인 것들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싸움이다.

이러한 싸움없이는 고상하고 정신적인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상하고 정신적인 것들은, 계급투쟁 속에서

승리자의 손에 굴러 떨어진 전리품의 이미지와는 다른 양상을 하

고 있다. 그것은 신뢰, 용기, 유우머, 기지, 불굴성으로서 이러한 투

쟁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또 지나가 버린 머나먼 과거

의 시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덕목들은, 지배자에게

굴러떨어진 일체의 승이에 언제나 새로이 의문을 제시할 것이다.

마치 꽃들이 해를 향하듯, 과거 또한 알 수 없는 종류의 신비스러

운 向日性에 힘입어, 바야흐로 역사의 하늘에 떠오르는 바로 그

해를 향하려고 하고 있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모름지기 모든 변화

들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이러한 사소한 변화에 정통하지

않으면 안된다.

 

5

과거의 진정한 像은 휙 스쳐 지나가 버린다. 다만 우리는, 그것이

인식되어지는 찰나에 영원히 되돌아올 수 없이 다시 사라져 버리

, 마치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상으로서만 과거를 붙잡을 수

있을 뿐이다. <진리는 우리들로부터 달아나 버리지 않을 것이다> -

고트프리트 켈러에서 연원하는 바로 이 말은 역사적 유물론을 관

통하는 역사의 이미지를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현재

에 인식되지 못했던 모든 과거의 상은 언제든지 현재와 함께 영원

히 사라져 버릴 위험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6

지나간 과거의 것을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도대체

어떠했던가>를 인식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은 어떤 기억을 붙

잡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 유물론에서 문제

가 되는 것은, 위험의 순간에 역사적 주체에 예기치 않게 느낫없

이 나타나는 과거의 이미지를 꼭 붙잡는 것이다. 위험은 전통의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전통의 수용자에게도 닥쳐온다. 이 양자는

하나같이 동일한 위험, 즉 지배계급의 도구로 이용될 위험에 직면

하고 있다. 어떠한 시기든, 바야흐로 전통을 압도하려는 타협주의

로부터, 언제나 새로이 전통을 싸워서 빼앗으려는 시도가 행해지

지 않으면 안된다. 메시아는 구원자로서만이 오는 것이 아니다.

는 반그리스도의 극복자로서도 오는 것이다. 과거로부터 희망의

불꽃을 점화할 수 있는 재능이 주어진 사람은 오로지, 죽은 사람

들까지도 적으로부터 안전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투철하게 인식

하고 있는 역사가뿐이다. 그런데 이들 적은 승리를 거듭하고 있다.

 

7

고난과 비참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는 이 골짜기의 암흑과 혹한을

생각하라. - 브레히트, [서푼짜리 오페라]

 

퓌스텔 드 쿨랑지는 역사가에게, 만약 그가 지나간 한 시대를 체

험해 보고자 하면 모름지기 그 후에 일어난 일체의 역사적 진행과

정을 아예 머리에서 떨쳐버릴 것을 권고하고 있다. 역사적 유물론

이 파괴했던 역사방법론의 성격을 이보다 더 단적으로 말해주는

발언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감정이입의 역사방법론인데,

방법론의 근원은 심장의 나태, 즉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진정

한 역사적 이미지를 붙잡는 데 절망함으로써 생겨난 태만이라는

병이다. 중세의 신학자들에게 이 병은 멜랑코리의 근원으로 간주

되었다. 이러한 병에 친숙했었던 플로베르는 <카르타고를 소생시

키기 위해 내가 어는 정도 슬퍼지지 않으면 안되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러한 슬픔의 본질이 무엇인가는 다음과 같은 질문, 즉 역사주의의

신봉자들은 도대체 누구의 마음이 되어 보려고 감정이입을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 본다면 한층 더 명확해질 것이다. 대답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승리자의 마음이 되어 보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런

데 그때마다의 새로운 지배자는 그들 이전에 승리했었던 모든 자

들의 상속자이다. 따라서 승리자의 마음이 되어 본다는 것은 항상

그때마다의 지배자에게 유리하게 됨을 뜻한다. 이로써도 역사적

유물론자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승리를 거듭해온 사람은, 땅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들을 짓밟고 넘어가는 오늘날의 지배자의 개선 행

령에 함께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전리품이란 지금까지 으레 그러

했던 것처럼 이 개선행렬에 함께 따라다닌다. 우리가 문화유산이

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 전리품을 두고 하는 말인 것이다. 이러

한 문화유산을 역사적 유물론자는 일전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비판

적으로 관찰한다고 보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가 문화유산에서

개관하는 것은 하나같이 그에게는 전율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원

천에서 비롯하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문화유산의 현존재는

그것을 창조한 위대한 천재들의 위대한 노고뿐만 아니라, 이름도

없는 동시대의 부역자들의 노고에도 힘입고 있는 것이다. 야만의

기록이 없는 문화란 있을 수 없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한번도 없

. 문화의 기록 자체가 야만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이

사람 손에서 저 사람 손으로 넘어가는 전승의 과정 또한 이와 조

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유물론자는 가능한

한도내에서 이러한 전승으로부터 비켜난다. 그는 결에 거슬리는

역사를 솔질하는 것을 그의 과제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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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억눌린 자들의 전통이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교훈은, 우리들

이 오늘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비상사태>라는 것이 예외가 아니

라 상례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인식에 상응하는 역사의 개념

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비상사태를 도래

시키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는 것이 명약관화해질 것이고, 그리고

이를 통해 파시즘에 대한 투쟁에서 우리가 갖는 입장도 개선될 것

이다. 파시즘이 승산이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반대자들이 진

보라는 이름을 하나의 역사적 규범으로 삼아 이를 들고 파시즘에

맞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지금 체험하고 있는 일들이 20

기에 들어선 오늘날에도 <여전히>가능할 수 있다는 놀라움은 결코

철학적 즐거움이 아니다. 이러한 놀라움은, 그러한 놀라움을 생겨

나게 하는 역사관이 지탱될 수 없다는 인식이 전제되지 않으면 인

식의 출발점이 되지 못한다.

 

9

나의 날개는 날 준비가 되어 있지만 나는 기꺼이 되돌아가고 싶었

. 왜냐하면 비록 내가 영원히 머물더라도 나는 행복이 갖지 못

할 테니까. - 케르숍 숄렘, [천사의 인사]

 

클레가 그린 새로운 천사라고 불리우는 그림이 하나 있다. 이 그

림의 천사는 마치 그가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금방이라

도 멀어지려고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묘사되어 있다. 그 천

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있고, 그의 입은 열려 있으며 또 그의 날개

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도 바로 이렇게 보일 것임에 틀림없

. 우리들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바

로 그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쉬임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을 바라보고

있다. 천사는 머물러 있고 싶어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깨우고 또

산산히 부서진 것을 모아서는 이를 다시 결합시키고 싶어한다.

러나 천국으로부터는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또 그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록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

는 그의 날개를 더 이상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

리고 있는 미래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도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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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이 수사들에게 명상을 위해 규율로서 정하고 있는 대상들은

이 세상과 속세의 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금 우리가 추적하고 있는 생각들도 이와 유사한 목적에서 나온 것

이다. 오늘날 파시즘의 반대자들이 희망을 걸었던 정치가들이 파

시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들 자신이 내걸었던 大義를 저버림으

로써, 그들의 패배를 확인하고 있는 이 마당에서, 이러한 생각들이

노리는 바는, 이들 정치적 현세주의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쳐놓은

함정의 올가미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 있다. 이러한 관찰은,

들 현실적 정치가들의 진보에 대한 고집스러운 믿음과 <대중기반>

에 대한 신뢰,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사회적 정치적 기구에 대

한 노예 같은 맹종과 동화가 실제로는 동일한 내용의 세 가지 양

상에 불과하다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관찰은 또한, 이들

정치가들이 계속 고수하고 있는 역사관과 일체의 복잡한 마찰을

기피하는 하나의 역사관을 위해서 우리들의 관습적 사고가 얼마난

높은 대가를 치리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한번 보여 주고자 하는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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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사회민주주의에 깊이 자리잡고 있던 타협주의는 그들의

정치적 전략에서뿐만 아니라 그들의 경제관에도 그대로 남아 있

. 후에 사회민주주의가 겪는 파국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바로

이 타협주의이다. 시대의 물결을 타고 나아간다는 생각만큼 독일

의 노동자계급을 타락시킨 것은 없다.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부터,

기술의 발달과정 속에 들어 있는 공장노동이 하나의 정치적 과업

을 수행하리라는 환상에 이르기까지는 그야말로 오십보 백보이다.

해묵은 프로테스탄트적 노동윤리는 독일인들 사이에서 세속화된

형태로 그 부활을 맞이하게 된다. 고타강령은, 노동을 모든 부와

문화의 원천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이미 이러한 혼란의 흔적을 내포

하고 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챈 마르크스는 <자신의

노동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인간은 소유주가 된 다

른 인간들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고 말함으로써 이러

한 견해를 반박하였다. 이러한 반박에도 불구하고 혼란은 점점 확

대되었고, 그 후 곧 요셉 디츠겐은 <노동은 새로운 시대의 구세주

이다. 노동의 조건이 개선되면 지금까지 그 어떤 구원자도 성취하

지 못했던 부가 생겨날 것이다>라고 공언하였다. 노동의 본질에

대한 이러한 통속적인 마르크스즘적 견해는, 노동자들이 그들의

노동에 의해 만들어낸 생산품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한

은 그것이 어느 정도 그들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가를 깊이 생

각해 보지 않은 사고의 소산이다. 이러한 견해는 다만 자연통제의

진보만을 생각하고 있을 뿐 사회의 퇴행은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있

. 그것은 이미 그 뒤 우리가 피시즘에서 마주치게 될 기술주의

적 특징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들 특징 중의 하나는 1948

7월 시민혁명 이전의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에서 유래되었던 자

연개념과는 구별되는 불길한 조짐을 예고하는 자연개념이다. 이런

식으로 이해된 노동개념은 결과적으로 자연의 착취로 귀결되는데,

사람들은 순진하게도 자연의 착취를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와 대

립되는 것으로 파악, 이에 만족하고 있다. 이러한 실증주의적 견해

와 비교해 본다면 자주 조소의 대상이 되어온 푸리에 식의 환상은

놀랍고도 건강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푸리에에 따르면 사회적 노

동이 효과적으로 짜여진다면 종국적으로는 네 개의 달이 지구의

밤을 대낮같이 밝힐 것이고, 남북극의 빙하가 녹을 것이고, 바닷물

은 더 이상 짜지 않을 것이고 또 맹수들은 사람들의 명령에 순종

하게씀 되어있다. 이러한 것들는 모두 자연을 착취하는 것과는 거

리가 멀게, 오로지 잠재적 가능성으로서 창조물의 모태 속에 잠자

고 있는 자연을 창조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노동의 한 예를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다. 디츠겐이 표현했던 바의 <공짜로 거기에

존재하는>자연은 이러한 타락한 노동의 개념을 보완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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