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의 블로그에 놀러갔더니 '정치성향 자가진단' 을 주제로 한 포스팅이 있어서 흥미롭게 읽다가, 내친김에 자가진단까지 해버렸다.
자가진단의 두 축인 시장적인 자유에서는 -6.62, 개인적 자유에서는 -6.25가 나왔다. 한겨레21의 분류에 따르면 나의 정치적 성향은 자유주의적 좌파이며, 변영주 감독, 페미니스트 고은광순 부근이다.
꽤 재미있었던 건 사실이다.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사람들과 나와의 심리적 거리감이 두루뭉실하게나마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물론, 무가베가 나와 거리가 먼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겠지. ㅋ
그러나 나는 이 진단을 신뢰하지 않는다.
척도가 잘못 되었다. 언론사 나름대로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영국의 폴리티컬 컴퍼스를 참조해서 그런지, 경제정책에 있어서의 시장의 자유도, 그리고 개인 자유의 허용도를 가장 중요한 두 축으로 삼은 것이 문제다. 한국 사회에서 좌파라는 개념은 대북관계를 떼어 놓고는 논할 수조차 없는 개념이다. 이 축을 그대로 따를 경우, 박정희 전대통령은 좌파 중에서도 정통 좌파에 속하게 된다. 한국사회의 경우 페미니즘 및 사형제, 국토개발에 대한 태도도 중요한 문항 내지 축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다만 몇몇 가지 질문들은 내 고민이 멈춰 선 지점을 까발린다.
시장이냐, 정부냐? 케케묵은 질문이지만, 세계화라는 변수로 인해 20세기 초처럼 일관적인 대답이 어려워진 질문 중에 하나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입니다." 라는 얌전한 대답밖에는 못 내놓겠다. 그것이 사립대학교 사회학과에서, 얌전히 수업만 빼먹지 않고 들은 졸업생의 한계일 것이다.
국가냐, 계급이냐? 이 역시 낡은 질문이다. 이 두가지 사회적관계는 개인의 정체성 및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의 내용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며, 대개 중첩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는 질문은 선거와 같이 특정한 정치적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에서나 성립되는 것이다. 그 경우에는 학자적 이성보다 시민적 감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위와 같은 질문은 유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일상에서는 쓸모없는 질문이다.
복지와 일자리는 연계되어야 하는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기업과 같은 현대국가의 복지개념은 특히 제도적인 면에서, 취약계층의 일자리 정책과 연계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러나 그렇게 될 것이라 '보는 것'은 그 주장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를 결여한다.
복지가 그야말로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이며 그를 위해서는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높은 세금부담을 져야 하는 스웨덴 등의 복지국가의 이상은 그 타당성을 따지기 전에 내 정서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나라는 인간은 자립의지가 결여된 인간과 프리라이더를 구분하는 게 쉽지 않다. 개개의 인간이 지닌 잠재력에 대한 믿음이, "그러니까 너도 열심히 하면 좋은 날이 오지 않겠냐"는 단정과 얼마나, 어떻게 거리를 둘 수 있을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당혹스럽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는 서울에 계신 그 분과 감성을 같이 한다.
이렇게 해서 정치성향 진단은 그 질문이 기획된 의도와는 달리, 내가 얼마나 정리되지 않은 다양한 색깔의 질문들을 가득 머금은 스펀지같은 이인지를 드러내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그 수많은 질문들을 관통하는 프레임도 경험도 없으면서, 그렇다고 그 질문들을 뱉어내지도 못하는, 얄궂은 스펀지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