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발견.

Pooongkyung 2011. 6. 3. 00:07

기타 선생이 기말실기시험을 앞둔 중딩 아해들에게 온 정신을 쏟느라, 선생의 관심으로부터 깨끗이 잊혀진 나는 지난주 배운 도레미파솔라시도만 주구장창 반복해 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학원까지 차를 태워준 선임은 테니스 치고 집에 들렀다가 10시 반에야 숙소에 들어가겠다고 미리 이야기를 해놓은 터였다. 선임이 나올 동안 나는 카페 가서 간만에 유유자적 하고 있기로. 그래서 가방에는 숙소에서 챙겨나온 서동진의 책과 이병률의 시집이 들어 있었는데,

어쩐지 허전하다 싶어 주머니를 뒤적거려보니 잡히는 게 없었다. 가방을 열어봐도 마찬가지. 그때에서야 머리를 때리는, 숙소 서랍속에 고이 모셔둔 지갑의 잔상. 이때 시간이 8시.

길 한가운데서 멋쩍게 웃고 있다가, 가까이 있는 아파트 촌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건 말 그대로 대책없이 헤매는 셈이라, 발 가는 대로 몸 가고 한참 뒤에 마음이 헐레벌떡 뒤따라가는 식이었는데, 그렇게 한참 동안 낯선 동네 여기저기를 굴러다녔다. 그러다 나는 생활을 만나는데,

이제 막 퇴근한 가장의 아반떼 본네트에서 전해지는 온기, 떡볶이컵 속에 나무꼬치를 찌르는데 여념이 없는 도복 입은 단발머리 소녀의 발걸음, 두껍아 두껍아 헌집줄께 노래에 맞춰 까만 고무줄을 넘는데 열중한 아이의 미간의 찌푸림과 그 옆에서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자지러듯이 웃는 꼬마아이, 이들을 지켜보는 엄마의 입가에 물든 잔잔한 미소와 깊은 눈주름, 달그락거리는 그릇소리와 은근하게 코끝을 자극하는 밥냄새. 그러니까, 생활의 냄새, 이 생활의 풍경.

나는 한 때 그것이 나에게는 과분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김수영이 언제나 애태우던 것이어서, 그것만으론 지극히 무미할 것만 같아서 먼 곳에만 두고 싶었던 이 생활이 아이의 걸음처럼 아장아장 다가와 가만히 내 손을 잡았네.

그리고 발걸음이 멈춘 한적한 놀이터 어귀에서, 그네에 매달려 한참을 멍때리고 있었다. 그러다 밀린 문자에 답을 하고, 그러다 콘서트를 함께 볼 사람을 찾고, 그리운 친구의 목소리를 듣고, 낙서하고 다시 멍때리고. 그러다 훌쩍 10시 반이 되고, 선임의 차가 보이고, 나는 다시 가방을 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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