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사실 나에게 문학이란 수학처럼 몽매한 것이다. 한참을 들여다봐도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끝내 해답을 들여다봐야만 비로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그런 것이다. 따라서 나에겐 문학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과 회의가 공존한다. SONY-MD나, Olympus C-5050처럼, 다른 많은, 나를 거쳐갔던 또는 걸쳐져 있는 것들처럼, 이것 역시 악세사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보다는 조금 더 나은 듯한, 어떤 수업을 듣는지를 통해서 나를 표상하는 것도 대학교까지일텐데. 결국 어디에도 몰입하지 못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미끄덩 거리며 그렇게 살아가려는걸까, 나는. 

인간에 대한 긍정의 뉘앙스를 풍겼던, 인간에게 겹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차라리 상처다. 심하지 않았으면 하는, 적절한 약만 먹어서 끝나는 것이었으면 하는, 울지 않아도 되는, 웃어 넘기고 싶은. 상처다. 어딘가 숨을 수 있는 곳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도망쳐 숨을 것이다. 내 앞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서라도. 인간의 겹을 벗겼을 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그 끝에 남겨진 것을 보기가 두려운 것이다.

아버지들은 말했다. 있는 힘껏, 삶 앞에 맞서라고. 그것을 변화시키라고. 30년대를 이겨낸, 80년대를 딛고 선 아버지들은 늘 그렇게 말해왔다. 그러나 삶 앞에 도망칠 수밖에 없는 이는 어떤가. 그래, 까놓고 말해 나는 미당을 동정해왔다.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라는, 이 호기로운 문장의 의도는 분명코 불순하다. 그러나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의 바람은 더러운 것이다. 그래서. 검댕투성이인 그에게, 그 시대를 살다 간, 하얀 옷을 입은, 있었는지도 모르는, 민중의 원망을 들이밀어야 할 정당성이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나는 지킬 수 없는 인간이라면 차라리 포기해버릴려고, 파괴해버리려고. 있는 힘껏 달아나고, 내 목에 칼을 들이밀 때까지 숨으려고. 그 때 문학은 나의 망치이고, 나의 다리이고, 나의 피부인 것이다. 나에게 굳이,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있다면, 단지 이것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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