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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8.03 GMF 2011. 4
  2. 2011.07.09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3. 2011.06.29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GMF 2011.

TeatreToniC 2011. 8. 3. 23:20


크아. 이번에야말로 꼭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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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을, 나는 온전히 이해한다. 떠나는 이에게 소리쳐 저주를 하는 대신, 이삿짐을 싸느라 지쳐버린 그녀에게 따듯한 커피 한잔을 내려 주는 그를. 누군가는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그의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별 앞에 섰을 때, 공식처럼, 누구나 반지를 빼 던지고 곧 죽을 듯이 소리치는 것만은 아니다. 일어났다가 스러지는 이 세상 모든 사랑의 빛깔을 한가지로 수렴시킬 수 없듯이, 이별 또한 사랑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이라는 게 억지스러운 주장은 아닐 것이다. 사랑처럼, 이별 역시 연주자의 변주에 달린 것이다. 따라서 그건 영신의 말처럼 이기적인 것도 아니다. 그저, 지석은, 처음 영신의 손을 잡았을 때나 두근대는 마음을 속삭였을 때, 그 옆에서 허물을 벗고 잠들었을 때처럼, 지극히 그다운 방식으로 이별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모든 이별들처럼, 그곳엔 분노가 있고, 추억이 있고, 절망도 죄책감도, 그리고 지우지 못한 사랑도 있다. 그러나 손을 잡고, 울고, 주저앉는 대신, 그는 그릇을 싸고, 커피를 내리고, 양파를 자르고, 면을 삶는다. 둘은 다른 듯 보이지만, 결코 다르지 않다. 영신만큼은, 그것을 알고 있다. 그는, 있는 힘껏, 온몸으로 삭이며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난 여전히.

따라서 영화의 제목은, 물음은, 적어도 지석에게 만큼은 어울리지 않는다. 지석의 답은 너무나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는 사랑하고 있다. 영화의 제목은, 독백은, 그래서 온전히 영신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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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7년만인가. 일과 후 아이들과 함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를 봤다. 이번에 새로 산 고가의 음향장비가 설치된 해질 무렵의 학과장은 꽤 만족스러운 영화관으로 재탄생했다. 몇 번 있던 섹스 장면에서는 야근하던 이들이 토끼눈을 하고 문을 두드려 해명하느라 고생하기도 했으니.

하지만 막상, 조제..는 아이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던 것 같다. 엔딩 크레딧까지 다 보고 난 뒤에 불을 켰는데, 몇몇은 한참 졸린 눈이었고 몇몇은 또 어리둥절해 있었다. 감상을 나누면서는, 넘어가야 할 장면에서 필요 이상으로 시간을 끄는 것 같다거나, 일관적이지 않은 이미지들이 연속적으로 배치된 것 같다거나, 너무나도 낯선 감정이라 이해가 잘 안 된다고 털어놓았다.

이해한다. 20대 초반의 나 역시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음을 기억하기 때문에. 사실, 7년만에 다시 만난 조제는 내 기억 속과는 꽤나 다른 모습이어서, 나역시 새로운 영화를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해가 되지 않은 채 모호한 이미지로 남아 있던 장면들이 애틋하게 부풀어 올랐고, 몇몇 장면에서는 눈물을 밀어 넣느라 꽤나 고생했던 것이다. 

나는 이'들'의 장애가 눈물겹다. 조제같이 몸에 새겨진 장애뿐 아니라, 모든 사람은, 츠네오처럼, 무심히 그리고 오롯이 상처를 입고 입히는 마음에 새겨진 장애를 갖기 때문이다. 즉,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장애를 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눈에 거슬릴 정도로 도드라진다거나, 속옷처럼 꼭꼭 숨겨져서 평소에 드러나지 않다거나 하는 정도의 차이, 종류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장애는 모든 사랑에 빠진 이들의 본성에 가까이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랑하는 이들은 어느 정도는, 얼마 정도는 그 사람과 더불어 그 또는 그녀의 장애를 끌어안지만, 알다시피, 언젠가는 지치고, 마침내 한몸처럼 꼭 껴있던 손깍지를 풀어버린다.

"형, 지쳐버린 거 아냐." (류지)

사랑의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모든 사랑하는 이들은 장애를 지니고, 장애의 본질적인 속성은 불치다. 그것은 고쳐질 수 없는 것이다. 고쳐질 수 없는 것을 몸에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그 또는 그녀의 불치를 교정하려는 모든 노력은, 종결에 이르기까지의 갈등의 양상에만 차이를 둘 뿐, 필연적으로 실패할 운명에 놓인다. 기껏해야, 사람은 그것을 보듬고 쓸어안고 위로할 뿐이다. 그러니까, 깊은 사랑은 그것을 고친다기 보다는 함께 두고 보는 것에 있다.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건, 그런 것이다.

조제를 떠난 츠네오의 오열은 사랑의 그런 속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실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알고 있던 진실을 배신했기 때문에, 그런 자신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서 그를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 사랑이라는 도시의 불문율이다. 사랑이라는 도시의 시민권을 획득한 이들은 한평생 사랑하고, 사랑하는 만큼 배신하고, 위로받은 만큼 상처를 짊어지고 살아갈 것을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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