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석을, 나는 온전히 이해한다. 떠나는 이에게 소리쳐 저주를 하는 대신, 이삿짐을 싸느라 지쳐버린 그녀에게 따듯한 커피 한잔을 내려 주는 그를. 누군가는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그의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별 앞에 섰을 때, 공식처럼, 누구나 반지를 빼 던지고 곧 죽을 듯이 소리치는 것만은 아니다. 일어났다가 스러지는 이 세상 모든 사랑의 빛깔을 한가지로 수렴시킬 수 없듯이, 이별 또한 사랑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이라는 게 억지스러운 주장은 아닐 것이다. 사랑처럼, 이별 역시 연주자의 변주에 달린 것이다. 따라서 그건 영신의 말처럼 이기적인 것도 아니다. 그저, 지석은, 처음 영신의 손을 잡았을 때나 두근대는 마음을 속삭였을 때, 그 옆에서 허물을 벗고 잠들었을 때처럼, 지극히 그다운 방식으로 이별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모든 이별들처럼, 그곳엔 분노가 있고, 추억이 있고, 절망도 죄책감도, 그리고 지우지 못한 사랑도 있다. 그러나 손을 잡고, 울고, 주저앉는 대신, 그는 그릇을 싸고, 커피를 내리고, 양파를 자르고, 면을 삶는다. 둘은 다른 듯 보이지만, 결코 다르지 않다. 영신만큼은, 그것을 알고 있다. 그는, 있는 힘껏, 온몸으로 삭이며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난 여전히.

따라서 영화의 제목은, 물음은, 적어도 지석에게 만큼은 어울리지 않는다. 지석의 답은 너무나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는 사랑하고 있다. 영화의 제목은, 독백은, 그래서 온전히 영신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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