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우정론.

BookToniC 2009. 3. 4. 22:01

내 친구 중의 하나는 신촌에 있는 여자대학교의 선생 (김치수 : 문학평론가) 인데, 얼굴이 시커멓고 몽고추장이라는 괴상한 별명을 갖고 있다. 내가 술병으로 한 일년을 고생하는 것을 옆에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지켜보던 그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전화를 걸더니 관악산에 등산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라나섰는데, 서울대학교 4.19탑 뒷길을 한 10여 분 걸어가다가 도저히 못 가겠다고 내가 멈춰서자 그는 나를 한 일이 분 물끄러미 들여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앞장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한 한 달 뒤 그가 다시 전화를 걸어 이번에는 청계산을 가보자고 하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다시 그의 뒤를 따라 나섰고, 부끄러워라, 무려 다섯 번이나 쉬면서, 지친 노새처럼 헉헉대고 청계산 제 1야영지까지 올라갔다. 그는 내가 쉴 때마다 옆에 앉아 5월의 신록이나 산세의 아름다움, 맑은 하늘을 예찬하곤 하였다.

그 다음 주일에도 그가 전화를 걸어 청계산엘 갔는데, 이번에는 세 번 쉬고 올라갔고, 그 다음 주일에는 한 번 쉬고 올라갔다. 그 다음 주일부터는 조금씩 걷는 길이가 길어졌고, 한 두 시간쯤 걷게 되자, 다른 산 구경을 하자면서, 그는 나를 북한산으로 데려갔다. 이제는 다섯, 여섯 시간 정도는 산길을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몸이 튼튼해졌지만, 오 분만 쉬지 않고 걸어도 구식 증기기관차 같아지는 내 숨소리를, 참고 듣고 이런 험한 길로 나를 데려온 놈이 어떤 놈이냐는 호령 소리를 옆에서 아무 말 없이 다 받고서 그냥 빙긋 웃어버리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다.

일요일마다 산행을 하면서 그와 나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내가 숨이 가빠서 그런 것이지만, 숨이 별로 가쁘지 않은 요즘에도 그러하다. 우리는 아침 7시에 만나 별말 없이 산길을 걷는다. 그가 쉬자고 하면, 어느 틈엔지 숨이 목까지 차 있다. 그는 참외나 사과, 배를 꺼내 깎아 반쪽을 나에게 준다. 그는 어린애 달래듯, 이젠 잘 걷는데라고 말한다. 거의 매번 되풀이되는 칭찬이다. 어린애 달래듯, 혹시 내가 이젠 못하겠다 하고 나자빠질까봐 하는 소리다.

육개월을 넘기니까, 이제는 식욕도 좋아지고, 겁나는 일이지만, 다시 술 맛도 난다. "내가 자네 때문에 술병이 거의 나은 것 같네" 라고 말하면, "내년 가을에는 설악산에 데려다줄게" 라고 대답한다. 알랑방귀뀌지 말라는 말일 게다. 그는 매주일 나를 데리고 산엘 가는데, 이제는 그 친구가 갑자기 '인제부터는 혼자 다니게'라고 말하지나 않을까 겁난다. 그래서 이런 자리를 빌어 "그런 나쁜 짓을 하면 못쓰네" 하고 그를 타이르고 있는 중이다. 

우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그 작가는, 바다가 놀라온 것은 거기에 놀라운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좋은 친구가 놀라운 것은 거기에 놀라운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과연 놀랍다!

- 김현, 행복한 책읽기,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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