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고 돌아오다.

BookToniC 2009. 12. 24. 23:24

 지루한 글이었다 진전 없는 반복, 한사람의 생 읽
어내느라 소모된 시간들, 나는 비로소 문장 속으로
스며서, 이 골목 저 골목을 흡흡, 냄새 맡고 때론 휘
젓고 다니며, 만져보고 안아보았다, 지루했지만 살을
핥는 문장들, 군데군데 마지막이라 믿었던 시작들,
전부가 중간 없는 시작과 마지막의 고리 같았다, 길
을 잃을 때까지 돌아다니도록 배려된 시간이, 너무
많았다, 자라나는 욕망을 죄는 압방붕대가 너무, 헐
거웠다, 그러나 이상하다, 너를 버리고 돌아와 나는
쓰고 있다, 손이 쉽고 머리가 맑다, 첫 페이지를 열
때 예감했던 두꺼운 책에 대한 무거움들, 딱딱한 뒷
표지를 덮고 나니 증발되고 있다, 숙면에서 깬 듯 육
체가 개운하다, 이상하다, 내가 가벼울 수 있을까,
무겁고 질긴 문장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김소연, <버리고 돌아오다>, 문학과지성사
AND